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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11. 2023

나의 모유투쟁기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조금 넘었을 무렵, 젖이 말랐다. 아이는 분유를 한사코 거부했다. 처음 몇 번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앞집 엄마가 대신 젖을 주었지만, 제 몫의 육아로 지쳐 있을 그에게 이웃집 아이의 모유수유까지 매번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아이를 보며 속은 타들어갔지만, 아이는 배가 고파 울면서도 분유를 한 방울도 먹지 않으려 했다. 그 이후, 밥을 먹게 되기까지 죽지 않을 만큼의 분유를 홀짝이며 아이는 자랐다. 




엄마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분유 대신 나오지 않는 엄마 젖을 먹겠다 버티던 아이는 나다. 어린시절 내내 엄마는 마음을 졸였다. 또래보다 더디게 자라는 것도, 좋다는 음식을 먹여봐도 살이 오르지 않는 것도 그 시절 모유를 못 먹인 탓 같았다. 어른이 되어 생리를 곧잘 건너뛰는 것도, 우울증 약을 먹어야 했던 것도 엄마는 모유의 탓으로 돌렸다. 

“내가 너 어릴 때 젖을 못 먹여서 그래.”

경계를 푼 순간 엄습해 오는 엄마의 레퍼토리. 


“너도 날 닮아서 분명히 젖이 잘 안 나올 거야.”

출산 전부터 엄마는 단언하 말했다. 출산 후, 시원스레 나오지 않는 젖을 물고 한바탕 짜증이 난 아이를 어르는 내 앞에 별안간 엄마가 다가왔다.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아기 그만 울리고 젖 끊어.” 

응원은 못 해줄망정 스멀스멀 내 안의 불안을 일깨우는 엄마가 미웠다. 출산한 딸을 보러 서울까지 온 엄마를 피했다. 아이가 배고파 할 때면 집 안에서 제일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어가 젖을 먹였다. 그래도 아이 울음소리에 엄마는 나를 찾아왔다. 


아이도, 나도, 엄마도 괴로운 날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모유수유란 말인가. 마음만큼 무거워진 수유쿠션을 집어들 때면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은 없어.’ 

그러면서도 다음 수유시간이 다가오면 또다시 터벅터벅 수유의자에 앉았다. 


나는 왜 모유수유에 집착할까. 이 물음은 출산한 지 두 달이 가까워지는 지금에야 자신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엔 그저 울컥하는 마음으로 세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물리고, 아이를 달래고, 부족한 양만큼 분유를 먹이는 일을 반복했다. 시험기간마다 밤샘공부를 하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왜 공부를 할까’를 자문하게 된 수험생처럼 뒤늦게 고개를 든 의문이 새삼스러웠다. 처음 아이에게 먹일 젖을 짜던 날, 아무런 의심없이 ‘모유 레이스’에 올라탄 탓이다. 


최대한 자주, 많이 젖을 물려라. 새벽수유를 해야 젖양이 느니, 새벽에도 일어나서 물려라. 출산 후 일주일간 나오는 초유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엄마의 ‘선물’이니 최대한 많이 주어라. 따뜻한 국물을 먹고 단것과 매운 음식은 멀리해라. 아이가 먹다 잠들면 깨워서 먹여라… 조리원에서, 유튜브에서, 카톡창에서 보고 들은 말들. 말들은 채찍이 되어 나를 달리게 했다. 


우리 몸은 유방 안의 젖을 비워내면, 그만큼의 젖을 만든다고 한다. 하는 만큼 얻는다. 그건 내게 익숙한 주문이었다. 공부할 때도 일할 때도 나를 맹목적으로 만들었던, 쉬는 시간마저 아깝게 했던 주문. 수험생과 직장인일 때 그러했듯 최선을 다해 젖을 짜고, 나를 쥐어짰다. 짜고, 짜고, 또 짜는 나날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왜?’라고 질문했을 때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 늦기 전에 아이가 분유를 맛보게 해야 나중에 고생 덜한다며, 너도 언제 젖이 마를지 모른다며 전전긍긍하던 눈빛도. 주고 싶지만 줄 수 없어 애타는 심정, 엄마는 내가 그 심정을 알게 되지 않길 필사적으로 바랐다. 


아이를 낳기 전, 육아선배들은 말했다. 육아는 창살 없는 감옥, 행복한 지옥이라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라고. 물론, 쉽지는 않다. 잠도 못 자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고, 좋아하는 예능 한 편도 열 번에 걸쳐 끊어 봐야 하는 일상은 낯설고도 힘에 부친다. 하지만 그저 ‘힘들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메마른 겉껍질만 보고 나무의 상태를 판단하는 느낌이랄까. 메말라 보이는 나무가 사실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숨쉬고 있듯, 지금의 나도  아이를 보고 있으면 감탄이 차오른다. 

‘내가 이 사람을 만들었다니!’ 

하루에도 여러 번 되뇌며 새롭게 놀란다. 흔들리는 겨울나무 같았던 내 자존감을 작은 존재가 뿌리부터 단단하게 채워준다.  


그런 이에게 내가 주고 싶은 걸 줄 수 있다는 기쁨. 그거였다. 물론, 모유가 정말 분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모유엔 면역력에 좋은 성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 중 몇 가지는 분유로 채울 수 없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의 면역력을 결정짓는 요인이 어디 모유뿐일까. 모유는 엄마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라며 이런저런 이유로 모유를 줄 수 없는 엄마에게 죄책감을 주는 이른바 ‘모유라이팅’에도 반대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줄 수 있고, 주어야 하는 건 모유 말고도 너무 많으니까. 


내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들의 목록에 하나쯤 추가되어도 좋은 것.

나는 모유수유를 이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어깨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지 않을까? 아이를 안고 재우고 트림시키는 것만으로도 어깨는 매일 무거우니까. 모유수유를 하면서도 압박감보다는 기쁨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퉁치기엔 모유수유는 매 순간이 전쟁이고, 긴장의 연속이다. 엄마 품에 폭 안겨 젖을 먹는 아이와 세상 너그러운 미소로 아이를 내려다보는 엄마. 흔히 ‘모유수유’ 하면 떠올리는 광고 속 이미지는 사실 신화에 가깝다. 모유수유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된 진짜 모유수유는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나처럼 엉겁결에 입문한 초보 엄마에게는 수유보다는 투쟁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렇기에 이 글의 제목은 ‘나의 모유수유기’가 아닌 ‘나의 모유투쟁기’다. 지금부터 약 두 달간 모유와 씨름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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