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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Oct 25. 2023

수유를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STEP 1. 거즈 손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가슴을 씻는다
STEP 2. 가슴에 유두보호기를 착용한다
STEP 3. 수건을 세 번 접어 수유쿠션 위에 올린다
STEP 4. 접은 수건을 베개 삼아, 아기를 모로 눕힌다
STEP 5. 다른 수건 하나를 돌돌 말아, 아기 등 뒤에 받친다


수유를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젖은 물리면 저절로 나오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조리원에서 처음 경험해본 수유는 확실히 노력의 영역이었다.

 



직원이 아기의 뒷목을 잡고 숫자를 센다. 나는 물리는 쪽 젖을 손으로 단단하게 잡는다. 이 다음부터는 직원과 나의 호흡이 중요하다. 하나둘 셋, 하는 순간 아기가 입을 벌리면 직원은 아기의 입을 내 젖 쪽으로, 나는 젖을 아기의 입 쪽으로 집어 넣는다. 타이밍이 잘 맞아야 아기가 젖을 깊게 문다.

“다 물리면 신생아실로 오세요.”

직원이 만족한 듯 방을 나서면 수유가 시작된다. 하루에 몇 번씩 산후조리원의 내 방에서 반복되었던 풍경이다.


퇴원 후에는 산후도우미가 직원의 역할을 대신했다. 산후도우미가 출근한 첫날, 집 안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숨어 수유하는 내 앞에 그가 나타났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는 물었다.

“산모님, 가슴을 좀 잡아도 될까요?”

모유의 세계에선 그리 낯설지 않은 첫인사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콤비처럼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산후도우미가 퇴근한 후가 진짜 문제였다. 직원과 산후도우미가 해주던 일을 나 혼자 해야 했다. 한 손으로 아기의 뒷목을 지지하고, 다른 한 손으로 물리는 쪽의 젖을 잡은 후 속으로 하나둘 셋을 외쳤다. 아기의 입이 벌어졌을 때 두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아기의 입과 젖을 만나게 하면 되는데, 그래야 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해도 젖이 물리지 않자 아기는 울고, 시도가 계속될수록 입을 벌려주지 않았다. 수유쿠션 위에서 발버둥치는 아기를 다시 안아 자세를 잡고 젖 물리기를 수차례. 아기의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등에는 한 줄기 서늘한 땀이 흘렀다. 3킬로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울던 아기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분유를 받아먹었다. 며칠은 굶은 듯 벌컥벌컥 분유를 들이키는 아기를 보고 있으면  ‘도대체 누굴 위한 모유수유인가’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잘 지내?”

“못 지내. 모유수유 하다가 죽어가.”

“알지 알지.”

나보다 먼저 아기를 낳은 친구가 말했다.  

“모유수유 해보니까 젖소한테도 미안해지더라. 우유는 음료수처럼 그냥 뽑아 마시는 게 아니었어. 젖소 젖을 한 방울 한 방울 짜서 모은 거였어.”

친구 역시 혼자서 끙끙대다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자마자 모유수유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만두고 나니까 진짜 별 일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모유에 매달렸나 싶더라고.”

친구의 뒤늦은 깨달음을 전해 듣고도 그만 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완모(완전모유수유)냐 혼합(모유와 분유를 함께 수유)이냐 고민하는 애들은 다들 모유양이 웬만큼 되더라고. 완모한 친구는 조리원에서도 양이 너무 많아서 페트병에 젖을 담았대.”

똑똑.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유축기를 꽂으면 어쩌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나의 모유를 생각했다. 내겐 모유수유를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인 걸까.


아기를 울리고 먹이고 재우느라 지친 밤을 몇 차례 보내고 나서야 결심했다. 아침 아홉 시, 집으로 출근한 산후도우미에게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만 더 먹여보고 모유수유 그만두려고요. 이제 분유만 줄 거예요.”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졌다. 이제 나도 아기를 평화롭게 먹일 수 있다. 아기를 낳기 전 상상했던 것처럼 먹다 잠든 아기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먹이는 게 모유만 아니라면. 모유수유만 끝난다면.  


그날 오후, 불현듯 생각났다. 이틀 후 모유수유매니저가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수유 지원 프로그램을 조리원에서 신청했다. 뒤늦게 모유수유의 세계에 입문한 후 조급증이 일었고, 모유수유매니저에게 최대한 빨리 와주십사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차피 단유할 건데, 오지 마시라고 할까?’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망설였다.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보면 그만두고 나서도 후회가 덜 남지 않을까 싶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틀을 지냈다.


이틀 후, 모유수유매니저가 집으로 왔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였다.

“어디서 할까요?”

집을 한 번 둘러 본 그가 던진 첫마디였다.

“뭘 하나요?”

“마사지 해야지.”

엉겁결에 그와 안방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듯 침대 위에 하얀 패드를 깐 할머니 매니저가 말했다.

“이 위에 누워요. 그냥 누우면 젖이 사방으로 튈 테니까.”

또다시 낯선 누군가에게 나를 내맡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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