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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Nov 01. 2023

불량(수유)엄마

“조리원 어디 갔어요?”

침대에 눕자마자 할머니 매니저가 물었다. 다녀온 조리원 이름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이어졌다.

“내가 조리원 원장이었거든. 젊었을 때 조리원 아주 크게 했지요.”

물어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답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 근방에서 신의 손이라고 소문도 났었거든. 상담실에는 실장 하나 뽑아서 앉혀두고 나는 산모들 가슴마사지만 했지요. 조리원 마사지실은 마사지 베드가 따로 있어서 편한데, 이 침대는 아래가 막혀 있어서 불편해 죽겠네.”

침대 옆 수유의자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한참을 투덜댈 거면 왜 조리원 그만두고 우리집으로 마사지를 온 거지? 낯선 이에게 몸을 맡긴다는 불안에 그를 향한 불만까지 더해져 마음이 잔뜩 무거워졌다.

“가슴에 돌덩이같이 단단한 데가 많네.”

무거운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을 이리저리 잡아보던 그가 한쪽 손에 손수건을 들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가슴마사지는 산후조리원의 일과 중 하나였다. 2층 마사지실에서 전화가 오면 곧장 내려가 베드에 누웠다. 어느 날은 원장, 어느 날은 실장, 또 어느 날은 처음 본 누군가가 가슴을 누르고 꼬집듯 젖을 짜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팠다.

‘아픈 건 내가 아니라 내 가슴이다. 가슴은 내 일부지, 내가 아니다.’

여러 번 속으로 되뇌며 가슴과 거리두기를 해야 그나마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면 주섬주섬 옷과 함께 가슴을 챙겨 나왔다.


이번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릴 적 배 아플 때 엄마가 배를 살살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살짝 해서 효과가 있겠어? 저 할머니, 그냥 허풍만 떨다가 가는 거 아닐까?’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내게 또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자연분만했어요, 제왕절개했어요?”

“제왕절개요.”

“요즘 우리나라 산모들은 제왕절개를 너무 많이 해서 문제야. 충분히 밑으로 낳을 수 있는데도 배를 갈라서 낳는다니까.”

“그건 산모가 선택할 문제죠.”

“제왕절개를 하면 젖이 더디게 나오지요. 산모님도 보기보다 젖양이 적네.”

“그래서 단유하려고요. 아기도 힘들어하고, 저도 너무 힘들어요.”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이후로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빨리 이 시간이 끝나고 그가 돌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수유자세 좀 봅시다.”

드디어 마사지가 끝나고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말했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다 쓴 손수건 두 장을 건네주더니 아기가 있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사지를 받을 때처럼 이끌리듯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아기가 딱 싫어하는 쿠션이네.”

소파 옆에 놓인 수유쿠션을 보자마자 시작된 잔소리는 아기를 눕히고 젖을 물리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젖을 이렇게 잡고 물려라, 이 방향으로 물리라며 훈수를 두더니 급기야 소파 팔걸이에 걸터 앉아 내 가슴을 덥석 잡았다.

“유두보호기 없어도 되겠는데? 빼봅시다.”

처음 젖이 나오던 날, 젖을 짜보라며 산후조리원 원장이 유축기 깔대기와 함께 주었던 유두보호기다. 여태껏 보호기 없는 수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보호기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보호기를 빼고 나서도 아기는 젖을 물려 하지 않고 버텼다. 나와 산후도우미, 할머니 매니저 셋이 아기를 둘러쌌다.

“가슴을 납작하게 만들어야 아기가 물기 좋지요.”

엄지로 가슴 아래, 나머지 네 손 가락으로 가슴 위를 움켜진 그가 내 가슴을 아기에게 갖다댔다. 멈칫하던 아기가 젖을 물더니 천천히 빨기 시작했다. 같은 방법으로 반대쪽 가슴 역시 보호기 없이 수유하는 데 성공했다. 불만 가득했던 마음과 가슴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기가 울지 않고 젖을 물다니. 그것도 보호기 없이! 당장 일어나 그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수유가 끝나고, 그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모유수유매니저로서 그가 진단한 나의 모유수유 현황표였다. 수유자세라는 항목 옆에 큰 글씨로 ‘불량’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기는 젖을 먹고 싶어 하는데, 불편해서 못 먹고 있었네.”

졸지에 불량엄마가 되었지만, 내가 할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다음 주에도 와주실 거죠?”

“아까 단유할 거라면서? 근데 왜 또 와요?”

“아니에요. 꼭 와주세요.”

현관문 앞까지 나와 그를 배웅하고 나서야 알게 된 또 한 가지 사실. 단단했던 가슴이 한결 가볍고 말랑해져 있었다. 중력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가뿐해진 몸으로 사뿐사뿐 거실을 걸었다.


그날 저녁, 궁금한 마음에 직수(직접수유) 대신 유축기로 젖을 짜봤다. 평소보다 두 배 많은 양의 젖이 젖병에 담겼다. 반이나 찬 젖병을 믿기지 않는 듯 한참 바라봤다. 그 다음 한 일은 쇼핑. 동네 주민에게 만 원 주고 중고로 산 수유쿠션 대신, 거금을 들여 좋다는 수유쿠션을 주문했다.


다음 날, 부리나케 배송 온 수유쿠션을 세탁해 준비해두었다. 가지고 있던 쿠션은 중간이 오목한 모양이라 매번 수건을 한 번 더 받치고도 아기가 불편해했다. 평평하고 단단한 새 쿠션 위에 누운 아기는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첫날은 모든 걸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매니저의 가르침이 떠오르지 않아, 하던 대로 수유를 했다.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차츰 나아졌다.  


유두보호기를 뗀 채로 아기를 울리지 않고 수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 매니저가 다시 집으로 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안방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려다 물었다.

“다른 집 산모들은 침대 말고 어디서 마사지를 받나요?”

“식탁에서도 받고, 바닥에서도 받지요.”

방바닥에 매니저가 가져 온 패드를 깔고 누웠다. 마음과 가슴이 한결 넉넉해진 덕분이었을까. 가슴 위로 젖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등에서 물을 뿜어내는 고래가 된 기분이었다. 젖은 패드와 방바닥 위로, 나와 매니저의 얼굴 위로도 불시에 튀었다. 우리는 튀어 오르는 젖을 함께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가 말을 꺼내고, 내가 반응하는 식이었다.


“조산사가 뭔지 알아요? 나 젊을 때는 조산사 자격증이 있어야 병원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국립의료원 간호사로 있다가 결혼 후에는 남편이 차린 산부인과에서 일했어요. 지금도 삼양동에 달동네가 있나? 거기 가서 애를 받았지요. 진료비는 제대로 못 받았어. 진료비는 고사하고 우리가 뭐라도 보태줘야 할 형편이었지.”

"아..."

“내가 간호사라도 내 젖 아픈 건 어떻게 못 하겠더만. 돌젖이라고 하지요. 아기 낳고 젖이 딱딱해져서는 아파 죽겠는데, 아기는 힘이 없어서 다 빨지를 못해. 하는 수 없이 여덟 살짜리 시누이가 내 젖을 빨아서 풀어주었어요. 그렇게 스물아홉에 낳아 기른 아기가 지금 오십두 살이니, 내 나이가 많지요.”

“올해 여든이세요?”

“가만 보자. 그러네, 벌써 앞자리가 8이네.”

은퇴 후 조산사협회 모임에서 모유수유 지원사업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렇게 산모들 집을 다니며 수유를 돕고 있다고 했다.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내게는 이런 위로도 들려주었다.

“출산하면 머리가 텅 빈 것 같지요. 이해력도 그렇고 기억력도 예전 같지가 않아. 나도 그랬어요. 애 낳고 병원에 복귀하고 나니까 머리가 멍청하더라고. 시간이 가면 괜찮아지지요.”


마사지가 끝나고 거실로 나와 곤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둘이서 바라보았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두 번 만나면 끝이에요. 못 만나요.”

차를 가지고 오셨는지 묻자 “차는 없어. 내가 한때는 기사를 두 명 데리고 다니던 사람이에요”라는 마지막 허풍까지 놓치지 않은 그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쿨하게 돌아섰다.


그가 돌아간 후에는 보호기도, 아기의 울음도, 진땀도 없는 수유시간이 이어졌다. 모든 게 잘되었다며 흐뭇해할 무렵, 생각지 못한 방해꾼이 등장했다. 나른한 봄햇살의 얼굴을 하고 찾아와 평온한 수유를 위협한 그것은, 졸음이었다.


새로 산 수유쿠션 위에 편히 누운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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