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다음날 햄버거 가게 사장의 제안을 따르기 위해 나는 이른 시간에 보건소에 찾아갔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갖가지 검사를 하고 나서 화장실에서 소변과 대변을 묻혀 오는 일까지 다 끝마쳤다. 조금은 성가시기도 하고 배설물이 든 용기를 간호사에게 전달할 때 특히 수치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로써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약속한 대로 곧장 영수증을 찍어서 사장에게 보냈다. 그 후로 계속 기다려보았지만,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답장은 없었다. 고민하다가 점심이 지나서 전화해 보았다. 연결음이 한참 동안 이어진 끝에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이미 내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모양인지 사장은 대뜸 수고 많았다고, 아내한테도 말해보겠다고 했다. 내가 그럼 일은 언제부터 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사장은 지금은 바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연락주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침묵 속에서 멍하게 있다가 사장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대답을 피하는 듯한 태도와 이전까지의 대화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던 ‘아내’를 또 다른 결정권자인 것처럼 언급한 대목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게다가 이제까지의 숱한 면접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나중에 다시 연락주겠다는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면전에 대고 불합격 의사를 전하면 서로 불편해지니까 사장도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렇게 둘러대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거나 글을 써보려고 시도해 보았다. 마음이 어수선해서인지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고, 시선은 자꾸만 멀리 있는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해가 저물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예감이 점차 사실이 되어가는 것을 우울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나를 두고 간을 보았던 사장은 하루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거나 새롭게 나타난 지원자를 알바생으로 낙점한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거짓말로 드러난 사장의 말 때문에 오전에 개고생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괴로웠다. 억울하기도 하고 정확한 진실을 추궁하고 싶기도 해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입력했다. 많이 바쁘신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먼저 제안을 해주셔서 그대로 따랐는데 왜 대답이 없으신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름대로는 억하심정에도 최대한 예의를 차려가며 말한 것인데, 그 후로 또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려 보아도 답장이 없었다. 어쩌면 전혀 공격적이지 않은 내 말을 만만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상황이 이즈음 되니 차라리 직접 찾아가서 따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실천을 하기에는 이미 마감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경과된 시간을 확인하고 나니 오늘 계획했던 일과를 하나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낮부터 개고생한 것도 모자라서 그 이후로도 쭉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매번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스스로에게 화도 났고, 어제 일을 떠올려보니 후회도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단호하지 못했던 사장의 제안을 의심했더라면 어땠을까. 최소한 한 사람에게는 거짓말할 것을 각오하고 어제 다른 면접도 보러 갔더라면 덜 억울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계속 탓하다 보니 전날에 다짐했던 문학에 대한 마음가짐은 어느 순간 모호하게 느껴졌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런 추상적인 정신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치유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에 머릿속을 더 메웠던 것은 단지 지금 이렇게 억울할 거였으면 그때 그 면접을 보러 가는 게 맞았다는 확신에 가득 찬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