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성실함의 힘을 믿으며
나는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 혹은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은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인생은 살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고 싶었고 시도나 노력도 해보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이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에서 내가 좋아하는 요소도 분명히 몇 가지가 있다, 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
'꿈을 가지긴 가져야 하는데 무슨 꿈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특히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갓 졸업한 이들이 '나의 천직을 찾지 못하겠다'라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나이 대에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안다고 확신해도 나중에 바뀔 확률이 훨씬 높다. 사회에 나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하나둘 차차 알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헤매면서 찾거나, 결국엔 찾지 못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에서 나름의 보람을 발견해 간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질 이유도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내가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제법 잘하는 일'을 경시하는 것은 의외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내가 아직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그래서 그 분야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까지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럴 때 '해야 하는 일'로 기초 체력 다지기를 하면서 그다음 단계로 '내가 제법 잘하는 일'로 능력치를 올리고 그런 다음 '내가 원하는 일'과의 접점을 찾을 수가 있다.
무리하는 것이 되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원래 하던 대로 하고 있다면 내게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내가 무리한 만큼 앞으로 전진하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인생의 기회가 열리는 것이 현실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것밖에 없다는 절박감도 더불어 압박을 가한다. '무리'라는 말이 버겁게 느껴지면 '최선의 성실함'이라는 말로 대체하면 된다.
젊을 때 성실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기초 체력 쌓기 훈련 같은 거라서 몸과 정신에 각인시킬 수 있을 때 해놓지 않으면 훗날 진짜로 노력해야 할 때 노력하지 못하거나 아예 노력하는 방법 자체를 모를 수 있다. 잘될지 잘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노력했거나 몰두한 경험 없이 성장해 버리면 '헐렁한' 어른이 되고, 만약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이건 나의 최선이 아니었으니까' 라며 마치 어딘가에 자신의 최선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
'나는 이런 점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런 점은 나의 강점이야'라고 현실적으로 바라보며 나는 나대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득 양극화, 사상 최고 실업률, 막힌 계층 간 이동....
시대가 이렇다 보니 노력이나 성실함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촌스럽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열심히 해보자.
노력하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거라고 장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적어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그 나름의 보상이 주어진다.
겸손한 주제 파악이 인간의 미덕일 순 있지만 삶을 팽팽하게 지탱시켜주진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내가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는 기분은 내가 생생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실감을 안겨준다. 그렇게 조금씩 걸어 나가는 일,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결국 열심히 한 것들만이 끝까지 남는다.
-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저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 잘하는 것을 활용해서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할 때 자신감도 더 생기고 실력도 더 발휘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껏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법 잘하는 일을 외면한 채, 내가 아직은 잘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일에 매료되어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해본 것이 많이 없어 삶의 깊이가 두텁지 못한 나이이다 보니, 좌충우돌하며 나랑 맞는 일, 멋진 일을 계속 찾아 헤맸다.
그러다 보니, 취업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묻는 질문 중 "그래서 직무를 전환해서 이 일을 하기 위해 본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죠?" 하는 말에는 당당하게 구체적으로 대답을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무작정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구체적인 형태로 노력을 기울이며 차근차근 준비하지 못해 왔다는 걸, 그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말문이 턱 막혔었다. (난 그저 이 회사에서 신입으로 새롭게 시작해서 배워가고 싶었을 뿐인데..라는 말뿐이 안 떠올랐다.)
면접이 끝나고 나니까, "내가 진정으로 이 일이 하고 싶었던 게 맞나?"라는 의구심이 들었고,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전망이 밝고 멋있어 보이는 일이라는 생각에 대책 없이 뛰어들었던 것 같다. 난 진짜 하고 싶었다면 옆에서 말려도 냅다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사실하고 싶던 게 아니라는 걸 이젠 인정한다.
이일 저일 겪고 지나고 보니 이 세상에 나랑 꼭 맞는 일, 멋지기만 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보통의 나는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말에 반기를 들고, 나는 꼭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고 호기롭게 가진 것도 집어던진 채 멋져 보이는 것에 달려들곤 했다.
모순적으로, 그 과정에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법 잘하는 일'에서 오는 권태감을 버티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려는 자기 합리화가 섞인 선택들도 있었다. 하고 있는 일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일로 전환하려는 심리를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멋진 도전정신'으로 애써 포장해 왔다.
그리고 참 안타깝게도, 삶을 100m 달리기로 생각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해왔었다. 삶은 조금 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며 적당히 완급 조절해서 뛰어내야 하는 마라톤이라는 것을 모르고, 경주마처럼 달리며 성급하게 결승선에만 도달하고 싶어 했다. 자연히, 시야는 좁아지고 좁아진 만큼 놓치는 것들 많아졌다.
성실하되, 똑똑하게 성실하자.
적어도 내가 무엇을 향해, 왜 가고자 하는지 알면서 움직이자.
내가 어떤 가치를 따라 내린 선택인지, 스스로 논리적으로 설득하면서 움직이자.
그리고 '여유'.
삶에서 정말 중요한 태도이자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상황도 여유를 갖고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에,
급할수록 더 여유롭게 넓게 보려는 태도를 연습해야겠다.
본능을 역행해야 한다.
내 몸이 나를 방해할 땐, 나를 뛰어넘자.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