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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빌게이츠 Aug 16. 2023

퇴사표 (退社表)

20대 개발자의 퇴사 결심

 나는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갓 성인이 됐을 때 서울의 한 작은 스타트업에 개발자로 취업했다. 처음 사회로 나와 겪어본 직장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고 낙심할 때도 많았지만 이때까지 열심히 배워왔던 걸 사회에서 써먹는다는 게, 내 가치를 평가받는다는 게, 회사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게 마냥 재밌었다. 그렇게 사회초년생의 다사다난한 직장생활 4년이 훌쩍 지나버렸고 오랜 고심 끝에 오늘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주변에 퇴사한다는 얘기를 꺼내면 좋은 반응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기도 안 좋은데 어쩌려고 퇴사하냐", "돈도 잘 주는데 배가 불렀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은 채 몇 달을 고민하다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정말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지만 솔직히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어릴 적 삼국지에서 봤던 제갈량이 황제에게 출병의 타당성을 담아 쓴 출사표처럼 나는 미래의 나에게 퇴사의 타당성을 담은 퇴사표를 쓰겠다. 혹시 나중에 퇴사를 후회하더라도 이 글을 보면 "아 이건 ㅇㅈ이지" 할 수 있도록..


1년 차에 쓴 일기
3년 새에 무슨 일이


 첫 번째는 더 이상 회사의 비전에 동감할 수 없어서다. 우리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고 주력 상품이 없어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회사였다. 그만큼 망한 서비스도 많았다. 내가 입사한 이유이자 처음으로 맡아 자식 같이 돌본 서비스는 진작에 떠나보냈고, 그 이후로도 몇 번 열심히 개발한 서비스가 망해가는 걸 봐왔다. 내가 만든 서비스가 망한다는 건 겪어도 겪어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그러는 와중에 회사의 노선은 여러 번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더 이상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주제의 것이었다. 솔직히 돈 받고 시키는 일만 하면 그만이지만 목표도, 존재 의의도 이해할 수 없는 서비스를 수년간 개발한다는 건 의욕도 생기지 않고 너무 고된 일이다.


 두 번째는 휴식이 필요해서이다. 그간 회사 일정에 맞추기 위해 밤을 새우는 건 물론이고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입사 초기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새벽에 퇴근한 적도 있었고, 밤을 새우다가 깜빡 졸면 다음 날 첫 출근하신 분이 날 깨워주기도 했다. 물론 4년 내내 그렇게 일해온 건 아니지만 야근을 달고 살았고, 한두 시간 야근은 칼퇴로 생각하며 살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허약 체질이던 나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됐다. 거북목, 척추 측만증 등등 뼈는 죄다 휘었고 달고 사는 염증만 한 손으로는 다 못 헤아린다. 당장 실력을 쌓고 연봉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오래 달리는 놈이 승자 아닌가? 롱런을 위해 조금은 쉬었다 가도 좋을 것 같다.


바보야!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게 많다. 놀고 싶다기 보단 배우고 싶은 게 많고,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다. 뭣보다 나만의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싶다. 나는 개발자라면 주변에 자랑할 수 있는 서비스 하나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앨범 한 장 없이 커버곡만 부르는 가수를 진짜 가수라 할 수 있겠는가? 개발자의 꿈을 갖게 된 것도 자기가 상상한걸 직접 만들어내는 모습이 멋있어서였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어릴 적 꿈꿔온 예술가 같은 개발자보단 그냥 카페인을 코드로 바꿔주는 기계가 된 것 같다. 올해가 가기 전에 세 개 정도는 서비스를 출시해보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걸로 생계도 유지하고 싶다. 물론 젊은 날의 객기일 수도 있지만 훗날에 "그때 해볼걸.." 하며 후회하는 거 보단 차라리 시원하게 말아먹고 "그땐 패기 있었지!" 하며 추억하고 싶다.


 오랜 생각을 이렇게 글로 정리하고 나니 속이 뻥 뚫린 기분이다. 힘들게 내린 결정인 만큼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보내보려 한다. 아무리 굳게 다짐한다한들 백수 생활에도 권태기가 찾아오고 나태해질 때가 오겠지. 그때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뭘 위해 백수가 됐는지 리마인드 해야겠다. 올해 회고록엔 좋은 내용만 가득하길!


그동안 수고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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