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어느 블라인드 테스트의 기록
2004년, 인터넷 게시판은 지금의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유튜브만큼이나 뜨거운 공간이었다.
그해 초, 오디오 동호회 게시판에서 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수천만 원짜리 하이엔드 앰프와 수십만 원짜리 보급형 앰프, 정말 소리 차이가 나는가. 단순해 보이는 질문 하나가 몇 달간 수백 개의 게시글로 이어졌다.
한쪽에는 세이류(전병희)라는 앰프 설계자가 있었다. 댐핑팩터, 과도응답 특성, 출력 임피던스 같은 공학 이론을 들고 나왔다. 수치와 그래프로 무장한 그의 논리는 탄탄했다. "기술적으로 우수한 앰프가 소리도 좋다." 명쾌했다.
반대편에는 실용오디오의 조광래가 있었다. 그의 주장은 더 단순했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증명하라." 귀가 아무리 좋아도, 눈을 가리고 편견을 걷어내는 순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논쟁을 매일 밤 읽었다.
댐핑팩터가 무엇인지, 왜 전원부의 크기가 중요한지, 인간의 가청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밤새 글을 읽고, 댓글을 읽고, 또 읽었다. 치과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켰다.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그 과정 자체가 짜릿했다.
그러다 어느 날, 논쟁이 현실로 이어졌다. "그럼 직접 해보자."
2004년 5월, 서울의 한 청음실에서 대규모 블라인드 테스트가 열렸다. 수천만 원대 마크 레빈슨 앰프와 수십만 원대 보급형 앰프를 눈 가리고 비교하는 자리였다.
동호인들이 자발적으로 장비를 들고 모였다. 누군가는 정밀한 전압계를 가져왔고, 누군가는 셀렉터 박스를 직접 만들어 왔다. 비용?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이 궁금했을 뿐이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자칭 황금귀라던 전문가들이 줄줄이 틀렸다. 앰프 리뷰를 쓰던 사람들도, 수십 년 오디오를 해온 고수들도 구분하지 못했다. 통계적으로 찍는 것만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
단 한 명, 20대 초보 동호인만이 높은 적중률을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음질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특정 대역의 미세한 소리의 차이—그 차이를 잡아낸 것이었지, 하이엔드의 우월한 음질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어떤 사람은 테스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항변했고, 어떤 사람은 침묵했다.
나는 결과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그랬구나.
그 논쟁 이후, 적어도 내 눈에는 오디오 판이 달라 보였다.
케이블 미신은 힘을 잃었고, "비싸면 무조건 좋다"는 말도 사라졌다. 블라인드 테스트라는 단 한 번의 사건이, 수십 년간 쌓여온 신화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10년 후 칵테일오디오를, 그리고 지금 WiiM을 선택할 때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측정치와 논리만 믿으면 되었다.
하지만 가끔 그 시절이 그립다.
밤늦게 게시판에 들어가 새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하던 설렘. 공학 이론과 청각 심리학을 넘나들며 치열하게 논쟁하던 열기. 주말을 반납하고 무거운 앰프를 들고 모여 진실을 확인하려 했던 동호인들의 순수함.
지금은 유튜브에서 클릭 몇 번이면 모든 정보가 나온다. 측정 데이터도, 비교 영상도, 리뷰도 넘쳐난다. 편리하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골라준 정보에는 그 시절의 뜨거움이 없다.
2004년 그 논쟁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들이 진실을 향해 함께 달려갔던 마지막 낭만이었는지도 모른다.
낭만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골치 아픈 앰프와 케이블 매칭 대신, 음악 그 자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