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도로를 달리던 잭(맷 딜런 분)의 자동차를 멈춰세우는 여인(우마 서먼 분)과 함께 시작된다. 여인은 고장난 차량을 고치던 중이다. 잭이 운전석 창문을 내리자마자 그녀는 부러진 잭(자동차 타이어를 갈 때 차체를 들어올리는 도구)을 보여주며 도움을 간청한다. 잭은 낯선 이에게 발목을 잡혀버린 사태가 성가셨지만 마지못해 동승을 허락하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꼬여만 간다. 게다가 여인의 수다는 도발적이다. 문득 견딜 수 없어진 잭의 우발적 선택. 그는 고장난 ‘잭’을 들어올려 여인의 머리를 내리친다.
<살인마 잭의 집 (The House That Jack Built)>은 잔혹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2018년 개봉 당시 화제를 모았다. 잔인한 묘사가 불필요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느냐는 대중의 비판이 각종 커뮤니티에 돌았다. 막상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그런 비판이 과연 정당한가?’하는 의구심과 함께 객석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선정성의 수위는 ‘예상보다’ 낮았고 — 여느 호러 영화와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주관적인 느낌이다 — 오히려 나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들이 난폭성에 주의를 빼앗긴 나머지 다른 묵직한 메시지를 놓치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잭과 버치(브루노 간츠 분)의 대화로 전개된다. 잭의 살인 에피소드들이 하나 둘 화면에 그려지는 동안 둘의 대화가 나레이션처럼 깔린다. 버치는 잭을 사후세계로 데려가는 중이다. 잭은 한 번도 사법체계에 의해 발각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던 자신의 만행을 버치에게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버치
방금 그가 잭을 사후세계로 인도한다고 했다. 버치는 저승사자인가? 그렇게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다정한 인상과 인자한 음성을 지녔다. 질문을 바꾸어 볼까? 버치 역을 맡은 브루노 간츠는 누구인가?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Wings of Desire)>에서 천사 역할을 맡았던 독일 출신 배우다. 지하철 안에서 어느 절망한 남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자 — 천사의 모습은 관객에게만 보일 뿐이다 — 절망이 서서히 희망으로 바뀌던 장면. 그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때 그 천사가 이 영화로 고스란히 건너와 있다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천사에게 작품의 경계, 세계의 경계 따위는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듯이. <살인마 잭의 집>은 브루노 간츠의 유작이 되었다. 배우는 지금쯤 어디론가 훌훌 날아가, 영화에서 버치로서 맡았던 임무를 계속 이어가는지도 모른다.
#사냥
영화의 결론을 “잭은 오로지 재미 삼아 인륜을 저버리는 극악한 사이코패스” 쯤으로 일축할 수 있을까. 건축가 잭은 여기에 예술을 개입시킨다. 자신이 벌인 살인을 ‘예술 작품의 재료’ 문제로 소급한다. 어떤 재료로도 꿈에 그리는 집을 지을 수 없어 절망에 빠진 잭은 몇 번이고 골조까지 완성된 현장을 밀어버린다. 완벽한 집 짓기가 요구하는 장인정신으로 무장해 있다. 그는 타살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새 재료를 탐색한다. 절망 상태로 ‘사냥’을 다녀오는 잭은 언제나 싸늘하게 식은 주검을 하나의 재료로 간주하고, 생명 없음에서 작품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이에 관한 버치의 비판.
”내 찬사나 박수를 바라나?“
”너무 비판적이셔서 애석할 따름입니다. 제 행실이 아닌 작품을 봐 주세요.”
“사냥이 은유하는 건 결국 사랑이라네. 그게 자네 논리의 약점이지.”
“당시에는 많은 일이 (...) 새 예술 작품에의 참여를 요구하며 제 공격성을 부추겼죠. 그래서 자재를 바꿨습니다. 신성한 자재로요.”
#부패
잭에 의하면 부패는 선도 악도 아니다. 선악은 살아있는 상태의 인간에게나 따질 문제일 뿐,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죽음 이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는 포도 넝쿨에 서리가 내리고, 포도가 건조되고 숙성되어 술로 익어가는 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생명이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가치에 주목한다. 스스로를 ‘교양살인마’라고 부르며, 죽음 이후에 생기는 신성한 쓰임을 항변한다. 그러나 정작 사후세계로부터 온 버치는 생각이 다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고 생명을 잃는 과정을 예술이라며 높은 가치를 메기고 있군.”
“버치. 당신은 무자비하고 꽉 막힌 노인입니다. 도덕적 잣대로 생명의 예술성을 죽이죠.”
“난 여전히 사랑 없이는 예술도 없다고 말하겠네. 부패가 정말 구원이라면 왜 집을 짓는 건가?”
잭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옹호하는 동시에 예술성을 죽이는 것에는 반발한다. 반면 버치는 생명과 예술을 모두 사랑의 신성 위에 교차시킨다. 도면을 들고 집터를 서성이는 건축가 잭의 고뇌가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하는 글렌 굴드의 영상과 번갈아 드리워진다. 어째서 잭에게는 생명성과 예술성이 별개인 걸까.
#숨결
의외의 사실. 잭에게도 생명성에 관한 소중한 기억이 있다. (카메라는 그의 어린 시절을 좇는다.) 열 살 남짓의 소년 잭이 풀밭에 앉아있다. 연장을 든 건장한 남성들이 일렬로 서서 걸음을 옮기며, 허리를 폈다 굽혔다를 반복하며, 키가 자란 풀을 벤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이 구령처럼 일률적인 호흡을 낳는다. 이 정직하고 단순한 신체노동은 마치 매스게임과 같아 보인다. 적막한 들판의 공기를 가르는 것은 오직 풀이 잘려나가는 소리와 일꾼들의 거친 호흡이 섞여 “후욱- 후욱-” 하는 반복적인 리듬뿐이다. 잭이 그것에 붙인 이름은 ‘풀의 숨결’이다. 거기서 생명력을 느꼈던 것이다. 풀의 숨결은 어린 잭에게 평온을 불어넣는다. 그렇다면 아늑했던 유년의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풀이 잘려나가던 순간을 복원하기 위해, 마치 풀을 베는 심정으로 다른 생명을 빼앗았던 걸까?
#버치
잭이 사건의 전말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덕에 버치는 그의 행적을 낱낱이 들여다본다. 그러나 잭은 불쑥 나타난 노인을 친구로 삼을 만큼 사교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버치에게만큼은 이토록 솔직하고 스스럼없이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사건들을 담는 카메라는 잭의 시선인 동시에 잭의 이야기를 듣는 버치의 시선이다. 이쯤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버치, 그는 혹시 잭 그 자신은 아닐까?’ 그는 잭 안에 울려퍼지는 모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귀이며 스스로를 검열하는 눈인 동시에, 스스로를 비판하는 목소리. 우리가 ‘양심’이라 부르는 것. 어쩐지 잭은 버치에게 솔직하고 친근하면서도 버치를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잭이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순간 순간마다 그의 내면에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을 버치를 (잭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원하는 원치 않든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억압하고 외면했던 버치가 회귀했다.
그것은 잭이 희생자들을 쌓아올려 집을 짓는 데 성공하는, 무척 괴이하지만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작품의 현장 한 구석에 앉아 잭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면서 버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후 잭은 버치를 따라 길을 나선다. 지옥으로 가는 길. 그리고 그 길에 어떤 창문을 지나게 된다. 창 너머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일꾼들이 그때처럼 풀을 벤다. 그 모습을 아득하게 바라보는 잭의 눈가에 처음 눈물이 맺힌다. 창을 열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분명히 여전히 거기에서 나부낄 풀의 숨결을 바라만 본다. 깊은 슬픔에 젖은 채 발걸음을 옮기는 잭. 나는 잭 역시 순진무구한 유년시절을 가진, 평범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고 여기며 측은지심을 품는 것이 아니다. 이 창문 장면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생과 사가 냉엄하게 갈라져 있다. 우리 모두는 돌아가고 싶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사건이나 순간을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 간직한다. 끊임없는 향수를 가진 채 점차 거기서 멀어지는 힘으로 살아간다. 그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잭은 알지 못한다.
버치는 시종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는 사랑타령이 영 무력하게 들린다. 잭의 달변에 비해 버치가 하는 얘기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이 그렇다. 그것은 말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따뜻한 내면의 목소리를 다해 끊임없이 읊조릴 수밖에 없다. 버치의 존재를 통해 잭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었을는지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 보았음에도 그에게 사랑은 없었다고 결론 짓는 이유다.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양심이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무능한 양심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은 2023년 12월 웹진한국연구에 최초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