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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Space Jun 20. 2021

자대 배치받는 날(2)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기차에 오른 시각은 오전 9시. 약 40일 만에 바퀴 달린 물체를 타고 떠날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하지만 느린 열차는 추수를 마친 논밭만 보여줄 뿐이, 본격적인 즐거움은 무궁화호에서 시작됐다.


  짐칸에 넣기에는 의류대가 커서 다리 밑 공간에 끼워 넣어야 했다. 대여섯 살 아이 크기만 한 가방을 지닌 채, 빠짐없이 자리를 채다. 발하기 전부터 골반이 저려왔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창밖의 풍경을 볼 생각으로 충분히 감수할만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피곤했는지, 잠을 청하려 하나 둘 눈을 감았고 열차는 슬슬 움직다.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창밖을 한참 바라보니 슬슬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도시를 상징하는 그것들이 '수웅-' 하며 다가오고 순식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했. 그즈음 인솔 간부의 지시로, 아침에 받았던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기차 안에서 경치 구경을 하며 도시락을 먹는 게 요즘 시대에 흔한 길인가. 밥이 식은 지는 꽤 됐지만, 소풍 가는 기분을 한껏 내며 반찬 하나하나 소중히 입에 채워 넣었다.


  열차는 신나게 전진하간간이 도착할 역의 이름을 소개하곤 했다. 익숙한 지명이 들릴 때마다 서울 가까워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원역을 지난 뒤로는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건물도 눈에 들어왔다. 입대 전에는 갈 일 조차 없어 일 년 넘게 발길이 끊겼던 수원은, 고작 40일 남짓하는 훈련 기간 덕분에 정답고 그리운 장소로 변모했다. 그 40일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았길래 변덕이 그리 심해진 건지... 한심하 한 내 모습을  세상 탓으로 돌리고, 원망 한숨과 자조 미소를 섞 창밖 지그시 띠어보았다.


  어느덧 창문에는 어제 본 듯 익숙한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서울에 가까워지니 정차하는 빈늘었다. 플랫폼에 적힌 역의 이름 익숙한 정도와, 그곳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의 수가 비례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열차 멈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한두 발짝 걸으면 닿을 거리를 나는 걸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고,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를 안쓰럽게 여겼을 것이다. 동물원의 동물의 기분이 이와 같지 않을까?


  열차는 사람 구경을 맘껏 시켜주고 한강 위를 지났다. 간격 확보를 위해서인지, 니면 이제는 한강 구경까지 시켜줄 셈인지 꽤 오랫동안 다리 위에 멈춰 있었다. 적절히 분산된 뭉게구름이 예뻤고 그 틈으로 나온 햇빛이 흐르는 강물 위에 잘게 부서졌다. 시민들은 하얀 마스크를 끼고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개와 산책하고 있었다. 글을 막 배우려는 아이에게 '평화'라는 단어를 일깨우는 데에 그것보다 좋은 장면은 없으리라.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이 미우면서도, 나 같은 군인 덕분이겠거니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시 열차가 움직였다.


  용산역을 지나, 왕십리 역도 통과했다. 30분 거리에 사랑하는 가족과 집이 있는데, 갈 수 없었다. 청량리 역도 통과했다. 가까이에 추억이 묻어 있는 학교가 있는데, 역시 갈 수가 없었다. 이상과 현실을 드나들며 익숙한 도시를 떠나보내고, 창밖의 화면은 다시 낮은 건물을 보여주거나 공장 혹은 황무지들을 보여주었다. 가끔은 너무나도 황량했다.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은 이미 잎을 다 떨구어 냈고 추수를 마친 논밭은 텅텅 비어 우울함을 더했다.


  어느덧 도착지에 내려 드디어 경기도 땅을 밟아 봤다. 분류표에 표기된 도착 장소를 찾아가니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군인들이 통제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낯설고 서투른 환경이 두렵기도, 짜증 나기도 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통제에 따라 이동해 자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중간에 내려 분류된  명의 사람들과 차를 타고 다시 이동했다. 오른쪽 을 보니 황무지에 눈이 쌓여 있었다. 앞쪽 창문으로는 서울이라는 글자가  녹색 표지판보였다. '제발, 제발..' 그쪽으로 가기를 바랐지만 차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모든 기대를 내려놨다. 될 대로 돼라...


  이제는 건물조차 보이지 않고 앞 창문에는 높은 산만 보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길을 지나니 거짓말 같이 무릎이 시렸다. 곧 저 멀리 작고 초라한 건물 하나가 보였다. 나는 운명을 직감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차는 위병소 앞에 멈춰 검문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환경으로 나를 들였다. 어색함과 두려움으로 무장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또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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