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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임투티 Jul 09. 2016

뜻밖의 직장인 취미, 홈가드닝

그럴듯한 취미가 생겼다. 

회사생활 그 고통.

30대 직장인이라면, 아니다. 정정해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일이 어려워서라기보단 일종의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복잡함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슴 속에 품어둔 사표를 던지고 싶지만, 부양할 가족이 있기보다는 다음달 카드사에 보내줘야할 명세서가 늘 내 발목을 부여잡곤 했다. 그렇다고 그렇다할 명품 브랜드를 산 것도 아니었고, 스타벅스 커피를 매일 모닝커피로 즐긴 소박한 사치도 아닌, 그냥 스트레스를 받아 먹게된 무수히 많은 맥주들과 맛초킹이 늘 이유였다. 더 무서운 건 이렇게 써버린 돈이 아니라,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마케터로의 성장에 대한 열망과 노력이 10년만에 흔들리고 말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맛초킹과 맥주의 환상의 조합을 이겨낼만한 대단한 행복과 증발해버릴 것 같은 내꿈을 다시 찾기 위한 마음의 힐링이 필요했다.



힐링을 찾아서.

주변 직장인들을 둘러보니 모두 비슷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았다. 주위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중,고등학교 그리고 무려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가장 가까운 친구녀석을 보니 녀석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한번도 배워본 친구는 아니었지만 극심한 직장 스트레스로 힐링을 위해 몇 주간 다닌 개인 교습을 통해 명화 부럽지 않은 그림들이 완성되었다. 여고시절을 늘 함께 붙어다닌 친구녀석은 사람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 컬러링북을 시작했는데 집중력이 높아지고, 충분한 힐링이 가능하다 했다. 또 다른 절친한 녀석은 매 주 자신을 위한 꽃을 선물하며 행복을 느꼈고, 미국에서 함께 지낸 동생은 퇴근 후 2-3시간의 강도 높은 운동과 건강한 음식을 사진찍어 SNS 올리는 일이 행복하다고 한다. 


여행 블로거로 오래 살아왔기에, 여행은 늘 나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시간과 돈이라는 큰 필요조건에 의해 일상에서 쉽게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운동? 필라테스를 3개월이나 다녔지만 극심한 거북목이 고쳐진데에 대한 감사함 외에는 행복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 나에겐 '오늘' 행복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육이를 만났다.



흙을 만지다. 

평소 풀독이 심하고 벌레를 무서워하니 흙주변엔 잘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택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흙을 하루라도 안 밟는 것 역시 싫은 일이었다. 출퇴근 하는길에 대문을 나서는 그 순간만큼에는 마당의 흙을 밟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우리 가족은 기존에 살던 주택을 팔고, 아빠 엄마가 꿈꿔온 드림하우스를 지었다.


추운 겨울 무사히 완공되었다.


지난 집들을 보면, 손재주 좋은 엄마가 꾸며놓은 정원은 주말이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예쁘다며 사진을 하도 찍어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기도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번 집에는 근사한 소나무보다는 다낭에서 만난 수국밭에 반해 꽃으로 집을 꾸미기로 했다. 수국을 사러 간 것이 농원에 발을 들인 처음이었다.  


정말 이런 파스텔톤의 하늘색과 노란빛이 나는 특별한 수국이다.


평소 작은 화분에 있는 수국만 보다가 농원에 가니 거대한 수국이 있었다. 수국의 종류도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흔하지 않다는 녀석이 하필 눈에 들어왔고, 몸값조차 굉장히 비싼 녀석이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아무말 없이 엄마와 서로 눈빛 교환이 있었다. 같은 의견이었다.


이녀석이야.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집 정원을 꾸밀만한 수국도 좋지만 내 눈엔 다른 녀석들이 들어왔다. 다육이.

식물에 손만 대도 죽이는 내가 이녀석들은 키울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일단 농원에 데려가고 싶어졌다. 왠지 모를 빈티지한 국자에 툭툭 심은 다육이가 어찌나 예뻐보였던지. 이 모습에 반해 무작정 데려왔다.



이름도, 성도 몰라요. 

정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참 간사하게도 '예쁘게 생긴' 녀석들 위주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이름표라도 있었지만 이름표 없는 아이들은 아직까지도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데려온 날이 4월인데 무려 3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쌍둥이처럼 구분이 어려운 녀석들도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그놈이 그놈같다. 나는 처음 데려온 이녀석들을 1학년이라 부른다. 


애석하게도 내 손에 실려와 힘든 시간도 많이 보냈을거 같고, 괜히 미안한 기분도 들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2학년이 되고, 새로운 1학년들이 오면 대선배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괜한 생각이 들어 1학년이라 불렀다. 1호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쨌든 1을 붙여주고 싶었다. 


흙을 제대로 만지기 시작한 건 아니지만 무작정 다육이들을 데려왔다. 다육이를 키우기 위해선 햇빛과 바람이 필수라는데 주택에 살기 때문에 그정도는 내가 무한제공 가능해 녀석들에게 잘 해보기로 했다. 반갑다 얘들아.






치와와는 잎꽂이에 도전했다 실패해 저모습보다 훨씬 작아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아무도 시들지 않았다. 장마를 지나 지금까지도 아주 잘 버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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