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단 일주일 간 열리는 아리타의 도자기 시장
아리타 (有田)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들한테도 생소한 소도시이다. 규슈의 인기 있는 관광지는 단연 후쿠오카이며, 많은 한국인들이 후쿠오카를 기점으로 벳푸나 유후인 같은 온천도시 또는 나가사키나 구마모토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을 찾는다. 이는 일본인도 예외가 아닌데, 아리타가 위치한 사가현 (佐賀県)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사가현을 간사이 지방의 시가현 (滋賀県)과 헷갈려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덕분에 사가현 내 어디를 여행하든 상당히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사가현에서 그나마 인기 있는 관광지인 아리타도 예외는 아니다. 아리타는 규슈 북부 사가현에 위치해 있으며, 규슈 3대 도자기 마을 (가라쓰, 아리타, 이마리) 중 하나이다. 인구도 2만 명을 겨우 넘는 데다가, 일본 본토의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라 일본인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유홍준 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일본 편>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리타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리타가 도자기 마을로 명성을 떨친 데는 우리로선 치가 떨리는 임진왜란이 한몫을 했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전쟁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 도공들을 데려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도조 이삼평 (李參平)도 이 전쟁 때 끌려온 도공 중 한 명으로, 정유재란 때 나베시마 번에 의해 사로잡혀 일본으로 오게 된다. 그는 도자기 기술을 전수하며 일하던 도중, 나베시마 번의 영지 주변을 탐색하다가 아리타의 자석광을 발견한다. 현재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자석광이 아리타에 위치해 있으며, 이삼평이 여기에 터를 잡기 시작하자 자기 가마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의 활약으로 아리타 도자기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수출되며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데 일조한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아리타는 아직도 일본에서 알아주는 도자기 마을이며, 몇몇 도요(陶窯)는 14대를 이어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 도자기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이삼평을 기리기 위해 아리타의 도잔 신사 뒤편에는 이삼평의 비가 있으며, 이삼평의 후손이 이어온 도요 또한 아리타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역사를 몰라도 아리타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 있는 상점들을 들러 도자기를 구입하고, 규슈도자문화관을 들러 규슈 도자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흔적을 쫓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한적한 분위기에서 도자기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을이지만, 4월 29일부터 5월 5일에 아리타를 방문하면 아리타를 관통하는 메인 거리가 교통이 통제되고 상인들로 가득 찬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리타를 방문한 5월 5일은 도자기 시장이 열리는 마지막 날로, 아리타 전체가 온통 도자기들과 사람들로 가득 찬 진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들과 다른 외국인들에겐 아리타 도자기 시장이 생소했는지, 아리타가 규슈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찾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인인 듯했다.
숙박을 아리타 주변의 타케오 온센 (武雄温泉)에서 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에서 예약을 안 하고 간 터라 일본에 도착한 후 전화를 해 보니 예약이 꽉 찼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 이마리의 게스트하우스를 겨우 예약하고 아리타로 가기 위해 하카타역으로 이동했다. 아리타역은 하카타역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1시간 20분 정도 지나면 도착하는 곳이다. (비지정석 ¥2,750) 열차는 사가현의 최대 도시인 사가역을 지나 사세보 또는 하우스텐보스까지 가는 차이며, 가는 내내 일본 농촌의 한적한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우스텐보스가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 곳이라 하우스텐보스행 열차를 타면 비지정석에 앉을 수 없을 확률이 크다. 아리타를 보려면 아리타역 또는 가미아리타역 (北有田駅)에서 내리면 된다.
아리타역은 마을의 규모에 맞게 아담한 역이었지만, 5월 5일엔 마을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찰 정도로 혼잡한 분위기였다. 짐을 아리타역의 물품보관함에 맡기려 했지만 벌써 모든 보관함이 꽉 찬 상황이었다. 다행히 안내센터의 일본인 아주머니가 한 상점을 가리키면서 저기에 가면 ¥300에 하루 종일 짐을 보관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짐을 맡기고 아리타를 돌아보기 위해 지도를 구하려 했지만, 역 내 안내센터에는 일본어로 된 지도밖에 없었다. 한국어로 된 지도는 없냐고 물어보니, 한 할아버지께서 아리타 도자기 시장 안내센터로 데려다주셨다. (친절한 아리타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짐 문제를 해결하고 아리타 도자기 시장의 지도도 구했으니, 시장에서 아리타 도자기들을 감상할 준비가 끝났다.
아리타역 바로 앞의 메인 거리는 한산했던 터라, 도자기 시장이 열려도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왼쪽 골목으로 진입하니 엄청난 양의 도자기와 도자기를 구입하러 아리타를 찾아온 일본인들로 가득 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소에 아리타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는 날이며, 많은 상인들이 정가보다 싼 가격에 도자기를 제공하니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여행객들이라면 골든위크에 아리타를 찾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리타 도자기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며, 몇몇 상점에서 화려하게 보이는 도자기들은 자동차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도자기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도자기들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충분히 구입이 가능한 것들이므로 찬찬히 둘러보고 맘에 드는 것을 구입하면 된다. ¥1000으로 싸게 파는 물품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을 정도로 아리타 도자기 시장에 나온 제품들 대부분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뻤다.
도자기 시장에선 일반적으로 도자기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컵, 접시, 그릇 외에도 꽃병이나, 인형, 장식품 등의 다양한 제품도 볼 수 있다. 흙으로 빚어낸 다양한 제품들을 보며 도대체 어떤 걸 사야 만족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리타는 일주일 동안 축제 분위기였으며, 곳곳엔 도자기 노점 외에 먹거리나 마실 것을 제공하는 포장마차도 들어서 있었다. 한 상점에선 도자기로 만들어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일반적인 악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잠시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시장이니만큼 규모도 아주 커서 아리타역에서 가미아리타역까지 4km에 달하는 거리가 모두 도자기 상인들이 연 노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상 시라면 1시간이면 갈 거리를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반나절을 다 쓸 정도로 각 노점마다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의 특색과 모양이 전부 달랐다.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하천과 어우러진 아리타의 전통 목조건물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리타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규슈의 3대 도자기 마을이 가라쓰, 아리타, 이마리라면 경기도의 3대 도자기 마을(?)은 이천, 여주, 광주이다. 마을의 수도 똑같고 규슈의 도자기 마을들이 조선도공들이 건너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교가 가능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경기도 도자기 마을 중 찾아간 곳은 이천밖에 없다. 여주 같은 경우는 신륵사와 고달사지를 보면서 여주도자세상을 들리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 들리지 못했던 아픈 경험이 있다. 이천은 아리타와 마찬가지로 축제가 열릴 때 방문했는데, 똑같은 도자기 축제라도 아리타와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이천 도자기 축제는 이천 도예촌이나 사기막골 도예촌 같은 도요 주변이 아닌 드넓은 공간인 설봉공원에서 열린다. 넓은 공간에서 쳐진 천막 내부에 노점이 들어서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하면서 편하게 도자기를 감상하며 구입할 수 있다. 또한 설봉공원 내 세라피아라는 멋진 박물관을 들릴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아리타와 같은 예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천 도예촌과 사기막골 도예촌이 많은 수의 관광객들을 수용하기엔 거리가 너무 좁고 위치도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도예촌에서도 일부 거리에 교통을 통제해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 자체를 비교하자면, 아리타 도자기 시장의 도자기가 일본풍을 띠며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특징이고 이천 도자기 축제의 것들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한국풍의 도자기를 별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생산자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소비자들이 그만큼 찾지 않기에 생산이 덜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한국스러운 도자기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리타에선 노점들 뿐 아니라 평상시에 들릴 수 있는 상점들 또한 평소보다 싼 가격에 도자기를 팔고 있다. 당연하게도 노점보단 상점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들이 가격도 더 비싸고, 품질 또한 우수하다. 시장을 걷다 보면 다른 상점들과 다르게 영어로 병기한 도요를 볼 수 있는데, 무려 14대를 이어 온 도요인 이마에몬 요 (今右衛門窯)이다. 이마에몬 요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만들어진 도자기들을 1대부터 14대까지 차례대로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14대 장인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반대편에선 이마에몬 요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을 구입할 수도 있지만,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싸 눈으로 보는 것에 만족했다.
가미아리타역에 가까워지면 오른쪽으로 도잔 신사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도잔 신사는 아리타 메인 거리와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오른쪽 터널을 통해 갈 수 있다. 도잔 신사는 아리타에 세워진 신사답게 석등이 아니라 도자기로 만들어진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이삼평을 기리는 신사로,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면 이삼평을 기리는 비를 확인할 수 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쉽진 않지만, 언덕 위에 도달하면 이삼평의 비뿐 아니라 아리타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확 트인 곳이다. 규슈 북쪽에 위치한 사가현이 지진에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라 그런지 기와로 만들어진 오래된 주택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풍경 또한 인상적이다.
도자기 시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가미아리타역이 나오고, 왼쪽 언덕길을 올라가면 이즈미야마의 자석광을 볼 수 있다. 이 곳이 바로 도조 이삼평이 발견한 자석광으로, 몇 백 년 동안 아리타에선 이 곳에서 채취한 재료로 도자기를 생산하고 공급했다. 현재는 수로 건설 등의 문제로 채굴은 중단된 상태며, 아리타 도자기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일본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채굴한 흔적은 산을 통째로 들어낸 듯한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아리타에 들리면 반드시 들러야 할 역사적인 곳이다.
자석광을 들린 뒤 다시 4km가 되는 거리를 걸어 아리타역 정면에서 보이는 규슈도자문화관을 방문했다. (도자기 시장은 다시 한번 둘러보아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아리타 시에선 셔틀버스를 제공해 관광객들이 어려움 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지 않더라도 아리타역에서 15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걸어서 문화관에 도착했다. 규슈도자문화관의 입장료는 무료지만 무료라는 입장료에 걸맞지 않게,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들은 돈을 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걸작이었다. 특별전에선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고, 상설관에선 규슈에서 생산된 오래된 도자기들을 통해 규슈 도자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아리타 도자기 시장이 열리는 때를 맞아 문화관에선 로또 추첨기를 통해 방문객에게 선물을 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와 동생은 가장 당첨 확률이 높은 엽서를 받았다.) 규슈도자문화관의 입구에는 도자기로 만들어진 커다란 시계가 있는데, 30분마다 한 번씩 오르골이 연주된다. 도자기 감상에 넋이 빠져 오르골 감상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아리타에서 이마리로 가는 기차는 JR이 아니라 사철인 마쓰우라 철도에서 운영한다. 아리타역에서 표를 구입해 탈 수 있고, 버스 타는 것처럼 뒷문으로 승차해 표를 받고 앞문으로 내리면서 요금을 지불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몰랐다가 아리타역에서 표를 구입한 뒤 뒷문으로 하차했다가 승무원이 헐레벌떡 뛰어와 표를 받아가게 만들었다.) 저녁은 규슈 북쪽 지방에서 니시아리타역 (西有田駅)과 오기역 (大木駅) 중간에 위치한 가라아게 돈돈 본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가라아게 돈돈 본점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거리에 있지만, 가게 안에 들어가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가라아게가 나오길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주로 차로 방문해 테이크아웃으로 구입한 뒤 집에 가서 먹는 것 같았다.) 부위 별로 판매하고 있었지만, 닭의 부위까지 일본어로 기억하고 있진 않았기에 그냥 ¥2,000짜리 패밀리세트를 구입했다. 2층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장소가 있어서, 밖에서 탄산음료를 산 뒤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일반 치킨과 다르게 냉동육이 아닌 냉장육을 사용해서 육질이 부드러웠고, 튀김의 두께도 얇아 닭고기 자체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한국의 치킨보다 양도 많아 이번 여행을 시작한 지 처음으로 배가 가득 찰 정도로 먹었다.
식사를 해결한 후, 이마리역으로 가기 위해 니시아리타역으로 가지 않고 오기역으로 걸어갔다. 오기역은 역이라기보다 버스 정류장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한 건물이었다. 당연하게도 내리는 승객은 없었으며 타는 승객 또한 우리뿐일 정도로 한산한 역이었다. 일본은 이런 한적한 곳에도 열차들이 정차할 정도라니, 일본이 철도왕국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오기역에서 이마리역은 마쓰우라 철도로 15분이면 도착한다.
규슈를 들릴 때 때마침 도자기 시장이 열리는 기간에 아리타를 방문했지만, 언제나 들러도 아름다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적한 분위기에서 거리를 따라 늘어선 상점을 들러보며 도자기를 감상하는 것 또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 년 52주 동안 단 1주일간 열리는 아리타 도자기 시장을 찾는 것은 골든위크에 규슈를 방문한 여행객들에겐 놓쳐서는 안 될 경험일 것이다. 5월에 아리타를 방문해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도자기 시장을 보며 일본의 색다른 모습을 느끼는 것은 어떨까.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리타뿐 아니라 이마리와 가라쓰를 함께 방문하는 것이 일본 최고의 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