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비행의 시작
게으른 여행자는 출발 전날까지 수하물 무게를 맞추느라 캐리어를 들고 몇 번을 무게를 쟀는지
팔이 조금 아팠다. 공항에 도착하면 여행에 대한 설렘이 모든 피곤함을 다 없애버린다는 말은 거짓말인 게 정말로 피곤했다. 여행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모든지 미루는 습관은 참 고치기 어렵네..
일단 첫날은 재미없게도 이동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렸다. 심지어 그린란드 근처도 가지도 못했는데
인천에서부터 파리까지 비행 12시간, 파리 공항에서 3시간 경유, 그리고 파리에서부터 코펜하겐까지 2시간 비행을 끝내니 이미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였다. 어차피 다음날 비행기를 타러 다시 공항에 와야 하기 때문에 그냥 공항 호텔에서 묵었다. 비싸지만 편리함 최고 역시 돈을 많이 쓸수록 몸이 편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그리고 다음 날 진짜로 그린란드로 떠나는 날.
나의 첫 번째 여행지는 누크 Nuuk. 여기에서 9일, 그리고 일루리사트 Ilulissat에서 16일 정도를 보내는 아주 심플한 여행 계획이다.
특히 누크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타 연주를 시작하며 “Hello, Nuuk!"라고 외친 그 장면에서부터 호기심이 생겨 시작된 여행인 만큼 너무나 기대되는 곳이었다.
코펜하겐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그린란드 국제공항인 Kangerlussuaq로 향했다.
하필 앉은 좌석의 모니터가 영 시원찮아서 도대체 어디 하늘 위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한 2시간이 지났을 때 이쯤 되면 도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승무원에게 질문을 하니 아직도 3시간이 남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누크가는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이미 누적 14시간 비행에 몸은 부서질 것 같았다 진짜로. 그렇게 3시간을 더 버텨 Kangerlussuaq 땅을 밟았을 때는 코가 얼다 못해 코털까지 크리스털로 만들어버리는 추위는 정말 짜릿했던 기억.
한 편 숨 쉬는 게 어색한 것이 영락없이 여행객의 모습이었는지 갑자기 현지 할아버지께서 말을 거시더니 그린란드 날씨가 해안가보다 내륙이 더 춥다는 깨알 정보를 주셨다. 그렇게 중국 화웨이 사가 아이슬란드부터 그린란드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했다는 등 근데 느리다는 등의 알쓸신잡을 이어가셨다. 실제로 그린란드 여행 중 사용했던 에어비앤비 숙소들에서는 화웨이 인터넷을 쓰고 있었다. (진짜로 좀 느렸음.)
어찌어찌 긴 시간을 하늘에서 보낸 후 그린란드 땅을 밟으니 덴마크와 시차가 -4시간, 한국과는 -12시간 밤낮이 바뀌어 있었다.
2층 규모의 Kangerlussuaq 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짜 작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건물 안 회전문만 지나면 국제선에서 국내선 터미널로 바뀔 정도로 아담했다. 나중에 그린란드에서 나올 때에는 정말 큰 공항이었음을 실감할 정도로 다른 곳들은 우리나라 동사무소 크기와 비슷했다. 문 하나 차이로 국내선 터미널로 넘어와 Nuuk행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SIM 카드 판매하는 곳도 없었고 무료 와이파이도 없어 문명과 떨어진 대기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친구 휴대폰으로 비행시간이 변경되었다는 국제문자가 와있었고 (통신사가 다른 나는 안왔다...) 뭐지! 우리 비행기 놓쳤나 순간 식겁했지만 다행히 지연 문자라 큰 문제는 없었다. 아무래도 비행기 타는 사람들이 다 코펜하겐에서 오는 사람들이니 승객을 두고 가는 스케줄로 변경되지는 않는 듯했다.
누크행 비행시간이 다 되었을 때 free좌석이라는 다소 생소한 티켓을 가지고 생전 처음 타보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으로 향했다. 지정좌석제가 아니어서 알맞은 자리를 찾기가 오히려 힘들었다는 웃픈 상황. 생각보다 소음이 심했지만 우리가 평소에 타는 비행기보다는 안전하다는 인터넷 정보를 믿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탑승했다.
작지만 서비스는 제대로였는데 중간에 제공되던 초코칩 쿠키는 정말 맛있었다. 나름 매너 있는 여행객의 모습으로 쿠키 하나를 집었지만 쿠키가 맛있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 현지 승객들은 애초에 2-3개 집는 모습을 보고 괜히 아쉬웠다. 이다음 비행부터는 조금 더 대담해지자라는 생각을 했다. 쿠키 맛집 에어 그린란드.
개인적으로 비행기를 탈 때 꼭 하는 루틴이 있는데 그건 바로 안전 매뉴얼 정독하기. 에어 그린란드의 매뉴얼을 살펴보았는데 굉장히 특이했다. 비상시 비상문은 밖에 냅다 던지는 그림이었고 특히 눈밭에 착륙했을 때의 상황도 있어 신기했다. 역시 눈의 나라여서 그런가? 동상에 대비하여 비행기 좌석 커버는 발에 감고 구명조끼도 몸을 따뜻하게 하는 용으로 그려져 있었다. 저 주황색 덮개(?)는 주는 건지 승객 옷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역마다 특색 있는 안전 매뉴얼도 여행의 참 묘미.
누크에 가까워지니 세상은 온통 흰색이었다. 프로펠러 엔진 같은 곳에서 바퀴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어느새 랜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항 도착 후 숙소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택시에 비해 사람들이 워낙 많아 택시가 금방 없어졌다. 한 10분을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아 이대로 걸어가야 하나 걱정이 많아졌는데 승객을 태우고 떠난 택시들이 하나 둘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MBTI를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잡 걱정이 많은 INFP의 성격이 여행할 때는 참 힘들다. 아무튼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면 바로 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숙소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안 왔는데 갑자기 1월에 눈이 내렸다면서 집 입구부터 쌓인 눈을 헤치고 들어가야 했다. 캐리어 바퀴가 머쓱해할 상황이었는데 배낭을 멘 상태로 23kg의 캐리어를 들고 문 앞 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이 참 암담했었다. 겨우 겨우 짐을 옮기고 문이 얼어 열리지 않을 수 있으니 수시로 문 앞 눈을 털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들은 후에서야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그렇게 순수 비행시간만 20시간에 도착한 그린란드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지만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채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렸다.
그린란드에서 첫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