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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손톱 Sep 15. 2024

계획 없는 유학생에 대하여

06. 불란서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이야기

1

앞서 말한 곡절 끝에 지금 나는 프랑스에서 지리학을 배우고 있다. 커리큘럼이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한 지리학은 실제로도 생각보다 꽤 많이 재미있었다. 프랑스어가 너무 안 따라주거나 과제가 너무 막막해서 울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건 지나 보면 다 잘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하다 보니 되는구나'를 몸소 느끼면서 자신감이 충전되었다. 그래봤자 자신감이 워낙 없다시피 해서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하긴 하다. 더불어 그런 막막함 속에서도 어찌 됐건 뭘 해야 끝이 난다는 것을 배웠다. 형편없는 수준이라도 일단 시작해야만 끝이 난다는 것을.

좀 재미없는 과목을 배우거나 교수님의 교수 실력이 떨어져서 재미가 반감이 되는 그런 과목도 있는데 그럴 때는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생각하고 들으면 그런대로 들을만하다. 한국에서라면 그런 수업을 들을 때 딴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때웠겠지만 이것도 언어 공부라고 생각하면 어찌 됐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앞으로 뭐가 될까?


2

계속해서 1년씩 연장이 되고 있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기간이 말이다. 이 유럽의 땅을 처음 밟았을 때는 1년을 목표로 했는데 그다음에 또 1년, 이다음에 또 1년이다. 1학년을 마치고도 2학년을 해보려는 이유는 아직 미련이 남아서이다. 정말 그뿐이다. 가끔 해외 취업을 하면 어떨까 생각도 한다. 이곳의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긴 휴가는 너무 달콤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족한 언어능력으로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더불어 석사까지 할 생각을 하면 그땐 대체 나이가 몇 살이람. 벌써 서른인데. 프랑스에서 대학 나와서 취업을 하려면 보통 석사가 기본이다. 학사 3년에 석사 2년을 더하고 앞선 어학연수 1년을 더하면... 6년을 학업에만 바쳐야 어디 서류라도 내밀어보고 면접장에라도 기웃거려 본다는 것인데 아득하다. 이미 한국에서 4년 동안 대학을 다녔는데 그럼 도합 10년이라니. 나는 이렇게 긴 세월을 공부에 투자할 만큼 돈도 없고 욕심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뭐가 되느냐니까?


3

친구들이 나에게 많이 묻는 질문은 이거다. "그래서 뭐 할 거야?" 그럼 난 "나도 모르겠어."하고 대답한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그 뒤에 덧붙인다. 응, 정말 모르겠다. 나는 머나먼 타국에서의 학업을 언제 마칠 것이며, 그것을 마치면 정말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그런 고민은 대학 가기 전에 생각해놨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마자용'하고 대답하겠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나에게 미래라는 것은 계획해 놓아도 수시로 바뀌는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계획을 해놓는 것이 더 좋다는 말에 백번 동의한다. 계획도 없고 줏대도 없으니 자꾸 팔랑거리는 수밖에. 계획이 없고 줏대도 없으면 자기가 한 선택을 돌아보고 후회하기 쉽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도 될 수 있는 존재다. 합리화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한 길을 딱 정해서 그 길만 파고들었으면 좋겠다. 그럼 생각을 덜해도 되고 더 편할 것 같다.


4

'배워 놓은 모든 것은 언젠가 그 쓸모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출처는 모른다. 누가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스티브 잡스를 보라. 대학 때 별생각 없이 들은 타이포그래피 강의가 애플의 디자인에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가! 뭐, 꼭 스티브 잡스까지 안 가도 나는 배운 것은 어쨌든 써먹을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서 간호사로 일한다고 했을 때, 프랑스어밖에 못쓰는 환자가 입원해서 다들 애를 먹고 있을 때 멋지게 나타나서 불어로 샬라샬라 대화를 하면 얼마나 멋질까! 물론 번역기가 발달했으니 프랑스어를 하는 간호사가 없다고 그리 애먹지는 않을 테지만.

나는 여전히 문득문득 튀어 오르는 무계획의 불안감을 느끼며, 이리저리 나의 진로를 찾아보려고 하고 있지만 아직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2학년 수업을 들어보며 수업 맛보기를 좀 해야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무계획으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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