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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재 Feb 16. 2016

템플 기사단의 어음 발행

동양그룹 법정관리 신청 앞서 

CP 발행해 ‘사기’ 비난을자초 

어음의 본질은 신용 준수인데

이를 외면하고 제 욕심만 챙겨  


필리프 4세는1285년 왕위에 올랐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말이 좋아서 ‘프랑스 왕’이지 실권을 따지면 영주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영국의 왕이 프랑스 남서부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교황의간섭도 만만치 않았다. 


권력을 강화하려면 우선 경제적 기반부터 다져야 했다. 그는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 바로 템플 기사단이었다. 필리프4세는 1307년 기사단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혐의는 동성애였다. 매일 밥 먹듯이 고문을 되풀이했다. 기사단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를 자백했다. 기사들은 모두 화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기사단의 재산을 집어삼키기 위해 후속 절차에 착수했다.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처지라 교황은 필리프 4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클레멘스 5세는 1312년 템플 기사단 해체를 선언했다. 주인 없는 재산을 왕실에 귀속시키기 위한 수순이었다. 


필리프 4세는 만세를 불렀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느라 템플 기사단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빚을 일거에 해소하는 동시에 막대한 기사단의 재산을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템플 기사단은 중세의 재벌이자 다국적 기업이었다.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알짜배기 부동산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무역은 물론 국제금융업으로 떼돈을 벌었다. 


출발은 미약했다. 1120년 9명의 기사로 출범했다. 돈도 없었다. 오죽하면 최초의 문장(紋章)은 말 한마리 위에 두 명의 기사가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기사단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창대(昌大)해졌다. 기독교도들의 기부와 교황의 지원 덕분이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1139년 기사단에 파격적인 특권을 제공했다. 기독교권에서의 자유 통행권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특정 국가의 법에 구속되지 않도록 치외법권을 보장했다. 오로지 교황의 지시만 따르도록 했다. 이는 곧 면세 혜택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성전(聖戰)과 순례자보호를 기사단의 존재 이유로 삼았다. 시간이 흐르자 부업이 본업 못지 않게 중요해졌다. 바로 순례자를 위한 여행 편의 제공이었다.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했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이 점령한 것은 예루살렘, 트리폴리 등으로 점(點)에 불과했다. 선(線)은 여전히 이슬람이 지배했다. 이슬람뿐 아니라 강도들도 순례자들을 위협했다. 


현금을 비롯한 귀중품 소지는 금기였다.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템플 기사단이 안전한 대안을 제시했다. 환어음 발행을 통해 금융서비스를 제공했다. 


순례자가 템플 기사단의 유럽 지부에토지 등 재산을 맡기면 환어음을 발행해 줬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이 환어음을 제시하면 현금을 지급했다. 세금도 내지 않고 환어음 발행 수수료를 챙긴 덕분에 재산은 눈덩이 불 듯 늘어났다.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키프로스 섬을 통째로 사들이는가 하면 대규모 선단까지 운영했다. 돈이 돈을 버는 상황이 벌어졌다. 


환어음은 템플 기사단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이슬람의 수프타자(Suftajah)를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아랍권은 이미 아바스왕조(AD 749~1258)때부터 수프타자를상거래 결제 수단으로 널리 활용했다. 


이슬람에서 환어음 제도가 발달한 것은 신용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신용은 곧 명예로 여겼다. 명예를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돈을 명예로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용을 어기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신용을 중시했기 때문에 계약도 간단했다. 악수를 나눈 뒤 하늘을 한 번 쳐다보면 그게 곧 계약이었다.  이슬람은 신용을 바탕으로 성립된 제휴를 ‘무전(無錢) 제휴’라고 부를 정도였다. 


동양그룹 계열사들의 기업어음(CP) 발행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일부에서는 ‘사기’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LIG건설과 마찬가지로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직전에도 CP를 발행했으니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동양그룹 대주주와 경영진은 어음을 그저손쉬운 자금 조달 수단으로 악용했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용은 헌신짝처럼 걷어차고 말았다. 어음의 본질은 신용이다. 신용을 무시한 인간들에게 명예는 허용되지않는다. 동양그룹 대주주와 경영진은 이미 타매(唾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참고문헌

1)   Graeber,David. 2011. Debt : The First 5,000 Years. New York : Melvillehouse. 

2)   Suftajah– ijaraloans.com

3)   KnightsTemplar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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