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했더니 소장이 날라왔다.
2025년 봄, 성북구의 산업단지에 위치한 중소기업 '유한회사 세인트웍스'.
세인트웍스의 대표, 이태준은 가구용 자동장치 제조로 이름을 알린 ‘에이피시스템즈’로부터 부품 조달 요청을 받고 그 회사 대표 김기황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미 에이피시스템즈와는 3년 전부터 몇 차례 물품 제작 계약을 체결하여 납품하고 있던 터였다.
이 건 계약도 이전과 특별히 다른 부분은 없었다. 8천5백만 원 규모의 납품계약.
계약서엔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품목, 수량, 납기일.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서명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원청인 에이피시스템즈는 초기 설계도면을 세인트웍스에 전달했다.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세인트웍스는 물량의 80% 이상을 약속된 일정에 맞춰 납품했다.
그러던 중 변수가 생겼다.
납품 중간, 에이피시스템즈 측이 기존 설계를 수정해달라며 새로운 도면을 보내온 것이다.
일방적인 변경이었다.
세인트웍스는 난색을 표했지만, 거래관계를 고려해 수정된 도면에 따라 추가 부품을 제작해 넘겼다.
추가 납품 대금은 3천만 원 이상이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 새롭게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다.
그동안 거래를 잘 해왔으니 당연히 반영해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납품을 받은 에이피시스템즈는 물품대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자금 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미안함은 아는지 성의로 새로운 납품처를 소개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미수금은 미수금이다.
게다가 2021년부터 쌓인 미수금도 있었다.
460만 원, 596만 원, 그리고 그 외에 누적된 미수금 하면 2천만 원에 이르렀다.
에이피시스템즈는 미수금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세인트웍스 대표 이태준은
에이피시스템즈 대표 김기황과 만나 그간의 누적된 불신과 미수금 문제로
더 이상의 납품은 어렵다고 말했다.
김기황도 별다른 대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측은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거래를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몇주 후, 뜻밖의 내용증명이 세인트웍스 사무실로 도착했다.
에이피시스템즈가 계약상 물품을 전혀 납품받지 못했다며 계약을 해제하고,
계약금 및 중도금을 전부 반환하라는 요구였다.
말 그대로 청천벽력. 이태준은 눈을 의심했다.
법정 공방이 시작되자,
에이피시스템즈 측은 납품이 일부만 이루어졌고,
계약 내용에 따라 채무가 이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태준은 계약 이행 내역, 납품서, 수정 도면 등 모든 자료를 제출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오히려 상대방이 설계를 마음대로 바꿔 추가 납품을 요구했고,
그 대금조차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각종 문자, 전화, 이메일, 계좌내역으로 입증하였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에이피시스템즈가 계약 해제 통지를 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떤 이행최고서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법상 계약 해제는 일방적인 선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행을 최고하고, 상당한 기간을 준 뒤에도 불이행일 때 비로소 가능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런 절차는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 회의에서는 양측 대표가 직접 만나 앞으로는 거래하지 않기로 구두 합의까지 했고,
에이피시스템즈는 미안하다며 다른 납품처까지 연결해줬다.
그런데도 에이피시스템즈는 거래를 해지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계약금과 중도금 반환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태준은 깨달았다.
'때로 사람은 자기의 미안함을 덮기 위해 상대방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모는구나'
계약은 종이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계약 위에 진실이 있고, 계약 밑에 신뢰가 깔려야 한다.
진실은 끝에가서는 밝혀지겠지만,
상대방이 미안함을 표시했다는 사실 자체도 증거로 남겼어야 했나.
미수금을 받지 않고 계약을 합의 해지한 건 상대방을 나름 용서하고 좋게 끝내자는 거였는데,
용서조차 그 흔적을 증거로 간직하고 있어야 했다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