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주파수

52헤르츠 고래

by 티모시

우주로 쏘아 올린 보이저호의 황금 레코드판 이야기가 잡학관의 밤을 휩쓸고 간 지 며칠이 지났다. 골목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목요일 밤, 시나리오 작가 지우는 평소보다 일찍 잡학관의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는 며칠 전 성진과 민우가 이야기했던 '우주를 떠도는 편지'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지만, 커서는 그 옆에서 길을 잃은 채 깜빡거리기만 했다.


"표정이 안 좋군요, 지우 작가님. 오늘은 뱅쇼를 좀 끓여봤습니다. 안개가 낀 날엔 계피와 정향 냄새가 마음을 좀 다잡아 주거든요."


성진이 뭉근하게 끓여낸 붉은 뱅쇼 한 잔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무조림을 지우의 테이블에 놓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맴돌자, 지우가 굳어 있던 어깨를 조금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민우 씨가 해준 보이저호 이야기요. 그걸 제 시나리오 속 주인공에게 대입해 봤거든요. 세상에 끊임없이 구조 신호를 보내지만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사람으로요.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숨이 막히는 거예요. 아무리 소리쳐도 상대방의 수신기가 고장 났거나, 아예 주파수가 다르면 어떡하죠? 결국 그 골든 레코드도 영원히 우주를 떠돌기만 할 뿐,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마침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던 민우가 우산의 물기를 털며 그녀의 말끝을 잡았다.


"주파수가 어긋난 소통의 비극이라, 작가님 시나리오가 점점 심연으로 가고 있네요. 그런데 작가님, 우주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지구의 심연에도 그런 존재가 있습니다. 혹시 '52헤르츠 고래(52-hertz whale)'라고 들어보셨어요?"


바 쪽에 앉아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던 박 교수가 돋보기를 내리며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 냉전 시대의 산물 말인가? 미국 해군이 소련 잠수함을 찾으려고 바다 밑에 깔아둔 수중 청음기망(SOSUS)에 우연히 잡혔던 그 녀석."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성진이 건네는 뱅쇼를 받아 들었다.


"맞습니다. 보통 대왕고래나 참고래 같은 수염고래들은 10에서 39헤르츠 사이의 낮은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해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동족들과도 대화를 나누죠. 그런데 1989년에 처음 포착된 이 정체불명의 고래는 무려 52헤르츠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튜바의 가장 낮은 음표보다 조금 높은 소리인데, 다른 고래들에게는 이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거나 의미 없는 소음으로 치부되어 버리죠."


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두었던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그 고래는 평생 다른 고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민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뱅쇼를 한 모금 마셨다.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이 이 52헤르츠의 궤적을 추적했어요. 녀석은 해마다 알래스카에서 멕시코까지 광활한 바다를 헤엄치며 끊임없이 짝을 찾고 노래를 불렀지만, 단 한 번도 다른 고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경로를 보면 다른 고래 무리와 겹칠 때도 있었지만, 주파수가 다르니 서로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한 채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녀석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고 부르죠."


가게 안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1장에서 이야기했던 '도도새'는 날개를 쓰지 않아 멸종했고, 2장의 '보이저호'는 수만 년의 시차를 두고 날아가고 있다면, 3장의 '52헤르츠 고래'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다를 헤엄치면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지우가 시나리오 속에서 풀지 못해 끙끙대던 주인공의 고독이 바로 그것이었다.


"참 지독한 형벌이네요. 같은 공간에 있는데 내 목소리만 투명하게 통과해 버리다니."


지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박 교수가 젓가락으로 무조림을 부드럽게 가르며 말했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생각하네. 녀석이 52헤르츠로 노래한다는 건, 자신이 다른 고래들과 다르다는 걸 스스로는 모른다는 뜻일 수도 있어. 응답이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수십 년간 매년 같은 경로를 헤엄치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나. 어쩌면 그 고래는 고독에 무너진 게 아니라, 언젠가 자신의 주파수를 알아들을 단 한 명의 존재를 향해 지독하리만치 희망적인 인사를 건네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성진이 지우의 빈 잔에 뱅쇼를 조금 더 채워주며 다정하게 덧붙였다.


"교수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우주로 날아간 골든 레코드나, 심해를 울리는 52헤르츠의 노래나, 결국 누군가에게 가닿으려는 그 '발신'의 의지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명 아니겠습니까. 지우 작가님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도, 주파수가 다를 뿐 분명히 누군가를 향해 노래하고 있을 겁니다. 이 뱅쇼의 향기가 안개를 뚫고 작가님을 이 자리로 이끈 것처럼 말이죠."


지우의 굳어 있던 입가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며 빠르게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는 주인공의 곁에, 조용히 그 진동을 느껴주는 누군가를 그려 넣고 있었다.


잡학관의 밤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오가는 주파수만큼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시나리오 속에서는 가장 따뜻한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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