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음'을 다시 읽고 난 후..
"그림을 그리면 너무 행복해요!"
"글을 쓰면 왠지 모르게 저를 찾는 것 같아요!"
"도자기를 빚으며 형채가 서서히 나타나는 순간 짜릿해요!"
"농사를 지으며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하나둘 자라는 걸 보면 행복해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무언가에 몰입하며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동전의 반대편처럼, 이런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림을 그리면 좋아질 거라고 했는데 전혀 저랑은 안 맞나 봐요"
"글을 쓴다는 자체가 고통인데 무슨..."
"흙 만지는 게 불편하고, 옷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요."
"새벽부터 나가서 해 질 때까지 땅과 풀이랑 씨름하라고요? 그냥 AI로 하면 안 되나요?"
"나 다움"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롯이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썼다. 원하는 것이 멋진 화가, 작가, 도예가, 아니면 농부가 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아하라는 법칙은 없다. 막상 해보면 위의 예처럼 별로인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진짜 ‘나다움’의 실마리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원하는 것’이 아닌, ‘좋아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 질문이 막아선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자기 자신과 그다지 친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거울 치료라는 것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직접 해보았다. 이게 도대체 뭔지 알아야겠기에? 거울의 나를 쳐다본다. 특히 눈을 본다. 한참을 보고 있자면 어색함을 넘어 괜스레 닭살이 돋는다. 내 얼굴인데도 낯설었다. 심지어 그런 낯선 나에게 말을 한다는 건 꽤 이상한 느낌이었다. 내가 나를 향한 것인데... 뭐, 사실 우리는 평생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산다. 거울을 통해 나를 보는 행위는 고작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잠시 스치거나, 머리 모양을 확인할 때나 들여다볼 뿐, 아니 요즘은 셀카도 있다. 비쳐지는 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교감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는 또 어떤가?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누구 목소리야?”라며 어색해했던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지 않는가? 매일 듣는 연인이나 부모님의 목소리는 1초 만에 알아채면서, 정작 내 목소리는 낯설어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소리에 익숙하지 않다. '나'라고 불리는 존재와 편안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만큼 친밀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재밌게도, 우리가 한눈에 ‘나’를 알아보며 미소 짓는 순간이 있다. 바로 오래된 사진첩을 넘길 때다. 어릴 때 사진, 고등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 조금은 촌스러운 결혼식 사진을 보며 “이게 누구야?”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아, 이때 좋았는데!”
바로 이 지점에 중요한 힌트가 숨어있다. 우리는 과거의 ‘나’를 보며 좋았다고 말한다. 지금과 다른 형태의 나이지만, 그것이 온전히 나였음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 헤매는 좋아하는 것이란, 다른 형태로 표현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림을 그리며 내 안에 있던 선과 색을 만났을 때 행복을 느끼고, 글을 쓰며 내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언어를 꺼내었을 때 나를 느낀다. 그리고, 나의 손끝을 통해 태어난 도자기의 모습에서, 나의 땀과 노력으로 자라난 열매에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 행복해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다르게 표현된 나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진짜 찾아야 하는 것, 우리가 마음속 깊이 ‘좋아하는 것’은 결국 나의 자아가 표현되어 “아, 이게 나구나”하고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오직 나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나의 모습.
그 모습이 찾아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나다움’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