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켜야 할 것들

냉소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

by TK

어릴 때는 나이 많은 사람이 말하면 이유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예의였고, 질서였고,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 배웠다. 그 시절에는 그럴 것이, 경험만이 유일한 정보였고 생존이었으며, 연장자의 판단이 사회를 지탱했던 시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계 최고 전문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기술과 환경은 몇 년 단위로 완전히 바뀐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말의 무게는 달라진다. 문제는 틀렸지만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린 쪽은 알고 있어도 말하지 않고, 윗사람은 모르면서도 왠지 모를 확신에 차 있다. 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예의라는 단어로 포장된다.



한국에서는 참는 것이 미덕이었다.


힘들어도 참고, 억울해도 참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삼켰다. 그것이 필요했었고 그 덕분에 이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미덕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 몸은 멀쩡한데 이유 없이 아프고, 겉으로는 잘 사는 것 같은데 마음은 점점 부서진다.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은 고쳐야 할 문화 환경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참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원인은 그대로 두고, 더 참고 버티는 능력만을 더 요구한다. 마치 불이 난 집에서 불을 끄는 대신, 더 뜨거운 열에 익숙해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끝은 어디일지...



형식적인 예의도 그렇다.


말투는 공손한데 내용은 폭력적인 경우를 우리는 너무 자주 본다. 존댓말로 모욕을 주고, 웃는 얼굴로 책임을 회피한다. 그런데도 “예의는 지켰다”는 이유로 문제는 흐릿해진다. 존댓말로 하는 욕설.


언제부터 우리는 예의가 사람을 대체하게 되었을까. 사람됨보다 형식이 먼저 평가되는 사회에서, 진심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회식 자리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소속감의 척도가 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이 충성심처럼 취급된다. 몸이 힘들거나, 집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도 그 설명은 늘 소속감이 부족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자리가 사람을 하나의 틀에 맞추는 시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한때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세상을 따라잡아야 했던 시절, 역사적 혼돈을 빠져나오며 질서를 유지해야 했던 환경, 생존이라는 큰 목표아래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했던 역사.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규칙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쓸모를 잃은 규칙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 자체로 부담이 되고, 때로는 사람을 해친다.



몇 주 전 텍사스 출장 시 갤버스턴의 해변에서 보았던 배들이 떠오른다. 서로 충분한 간격을 두고, 다투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습.


그 누구도 “내가 먼저 왔다”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인간 사회는 더 복잡하지만, 그만큼 더 성숙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지켜야 할 전통과, 내려놓아야 할 관습을 구분하는 일. 그게 아마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예의일 것이다.


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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