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의 선택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꾀병을 부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힘든게 당연하니, 도움을 요청하라는 의미인 것도 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왜? 내 마음이 들으니까.
타고난 연기자처럼 아픈척도, 슬픈 척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까? 아니지 이 모든게 드라마 대본이라서 현실과 다른것이라면 좋지 않았을까? 봐라. 아픈척을 하려면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부터 하게된다.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사는 내가 맞다. 조금 아픈건 버텨내는 것도 맞다. 이상이 있어보이면 부작용인가보다 하고 넘기는 것도 맞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픈 것이라는 거다.
그런데 아픈 척을 하라니? 미안하지만 그것은 말이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다.
왜 내 마음을 속여가며 아픈 척을 해야하는가. 아픈 척이라 하면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해야하는 것, 그리고 아픈 것을 더 과대 포장해야하는 것이다. 아마도 아이 셋과 집안일에서 나를 해방시키고자 해주는 지인들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애틋한 마음이 앞서서 그 당사자가 아메바 급으로 생각이, 마음가짐이 신체를 지배하는 단순한 세포들의 집합체인 것을 놓친 안타까운 조언들이다. 아프다는 말을 늘어놓으면, 정말 아픈 것 같다. 아프다가도 안아픈 날도 있고 안아프다가도 갑자기 아플 때도 있는데, 겉은 정상인으로 보이는 암환자는, '아픈 척'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365일 24시간 아픈 환자로만 살아야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아픈척을 하기 위한 메소드 급 연기와 더불어 '아파'라는 말을 내뱉어야 할 때가 있을 것인데, 과연?
그렇다고 나도 연기 안해봤냐고? 아니다. 해봤다. 많이 아픈날 괜찮은 척 연기도 해봤고, 조금 아픈날 너무 아프다며 핑계대고 침대에서 몸을 떼지 않은 날도 있다. 집안일하기 싫은 날이기도 했고, 내가 이제까지 해온 것들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좀 알고 당해봐라 라는 마음도 있었다. 누워있는 1시간동안 너무 좋았다. 정말 달콤한 유혹이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봤다. 너무 좋아서? 아니다. 일어나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몰랐으니까. 그런것은 대본에 없었으니까.
아프고 가장 서러울 때는 언제인가, 아픈데도 도와줄 사람이 없거나 아무도 몰라줄 때? 나는 이랬다. 분명 내가 아픈 환자인 것을 모르는바가 아닐텐데, 환경이 변화가 없고, 나의 집안일이 줄어드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분명 나의 공백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왜 자동으로 하지 않는것이지? 문어발 엄마가 나타나서 그런건가? 왜? 남편? 뭐하는거야? 역시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돌아온 나를 보고 헤이해진 눈치다. 내가 보내는 눈치는 항상 먹자마자 싸버리는 남편에게 모호한 신호는 쓸모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하지 못하는 밀당은 시작도 하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솔직해지는 것이 낫다. 그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해줄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사니까.
내가 아픈척을 하며 도움 주기를 기다릴 것인지 나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내가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아파'라는 단어보다, '쉴게'라는 말로 바꾸고, 지금 어떤 부분이 상황이 좋지 않다. 잠시 쉬어야할 것 같은데 이런것을 부탁해 라고 말하기로 한다. '저 사람이 내가 아니니, 저 사람에게서 나를 바라지 말자.'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정확하고 명확하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이게 나도 듣는 상대방도 훨씬 클리어한 관계유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길고 긴 투병이 현명한 선택의 연속이 되어야 함을 깨닫는 득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암은 왜 나에게 왔을까,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나는 '암'이라는 투병도 내가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선고를 받았을 때 '차라리, 암이라고 판정이 나왔으니 되어서 내가 경각심을 갖게 되었으니 되었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참 무서운 여자다. 첫 투병 그리고 +α 가 생긴 '전이' 판정일 때에도, 아 지난 4년간 거의 무늬만 암환자처럼 너무 쉽게 생각하고, 헤이했구나 라는 생각의 반성을 하게 되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생각과 마음가짐이 지배를 하는 아베마 급의 단순한 사람이기에.
안다. 나도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 그래도 나는 선택했다는 표현을 할 것이다. '암' 그리고 '전이'까지. 선택을 했으니,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도 어떤 누구도 아닌 내가 지어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가져온 암세포가 내 마음의 병에서 시작된 것을 아니까. 어떤 누구도 그리고 나도 증명할 수 없지만, 나는 아니까. 그 마음은 결국은 내가 고쳐야 하는 것이니까. 무늬만 4년이라는 시간 동안도, 나는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어떤 선택들을 할 때에도 가족을 위했고, 직장을 위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음에도 외면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의 세포들이 혼란이 오지 않았을까.
'암과 전이'라는 이 상황이, 나에게 조금 더 나를 돌아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처음 수술대에 바들바들 떨며 시술을 받았을 그 때에도, 천장만 바라보며 수술장으로 옮겨지는 그 때에도, 한발 내딛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그 순간에도, 마약성 진통제를 먹어가며 버티고 검사대에 누웠던 그 때에도 '아프지말자 더이상은'이라는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이 틀렸다. '아프지말자'가 아니라 '나로 살자'였어야 했다.
진짜 '나'로 살아보자.
더이상 '나'를 속이지말고.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