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 시간이 전쟁 같았어요.
신발이 마음에 안 든다며 떼쓰는 아이를 질질 끌고 나왔는데…
속에서 불이 나더라고요.”
“야외공연장에서 사람들 시야를 가리고 아이가 서 있었어요.
세 번을 제지했는데 안 듣더라고요. 손목을 휘어잡았어요.
그날은 저도 감정이 너무 격해져 있었거든요.”
“민원처리를 잘못한 직원에게 화가 나 있었죠.
그날은 무엇이든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관계대화법 수업 시간. 수강생들의 경험 나눔은 그날의 감정과 장면을 생생히 다시 데려왔습니다. 목소리 톤, 찌푸린 미간,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까지. 이미 끝난 일인데도 다시 말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이고, 머리가 아파온다”라고 말하던 한 수강생도 있었습니다.
그래요. 감정은 시공간을 초월하지요.
과거의 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갑니다. 아직도 종결되지 않은 사건은 상상만으로도 되살아나, 현재의 신체 감각을 뒤흔듭니다.
그런데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한 수강생은 자녀와의 등원 실랑이 후, 초록 잎들이 가득한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고 했습니다.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고… 피톤치드 향이 저를 위로하는 듯했어요.”
또 다른 수강생은 친구들과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고 했어요. 산미 가득한 커피와 부드러운 팬케이크에 웃음이 절로 났다고 하더군요. 놀라운 건, 그때의 장면을 다시 떠올리자 두 분 모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상상에 따라 이동합니다. 어떤 장면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 상태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2018년, 제가 허리 디스크 시술을 받았을 때 일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대기 중인 제게 전화를 걸어온 친정엄마가 말씀하셨죠.
“허리시술이 허리에 대바늘 꽂는 거라더라…”
전화 이후, 제 뇌 속은 온통 ‘대바늘’로 가득 찼습니다.
심호흡도, 명상도 잘 되지 않던 그 순간,
“김근하 님 들어오세요.”
시술을 앞두고 저는 상상력을 꺼내 들었습니다.
시술실 앞에서 제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걱정 마. 잘 될 거야. 기도하고 있을게.”
속삭이던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따뜻한 손의 온기와 무게감이 안정감을 주었죠.
그 장면을 상상하며 숨을 고르자,
경직됐던 척추가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얼마 후
“시술 끝났습니다.”는 의사의 말이 들렸습니다.
시술 시간이어 찌나 짧게 느껴지던지요.
그 순간 알았습니다.
상상은 단지 생각의 도구가 아니라, 감정의 회로를 바꾸는 열쇠라는 것을.
감정은 예고 없이 밀려듭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 앞에서, 혹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한복판에서도 불쑥 찾아옵니다.
목소리는 떨리고, 가슴은 조이고, 손끝은 얼어붙습니다.
그럴 때, 저는 상상을 통해 제 마음에 닻을 내립니다.
감정에 압도되지 않기 위한 방법이죠.
조용히 머문 바다 사진 한 장,
햇살 가득한 오후의 서재 풍경,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읽던 책,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담은 자연 식물들까지!
지금의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어느 날은 마음속에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장소를 떠올립니다.
좋아하는 카페의 창가 자리,
다양한 책들로 가득한 북카페,
잠시 숨을 돌리고 앉아있던 공원 벤치.
그곳에 나를 앉히고 부드러운 햇살과 느린 공기를 상상해 봅니다.
어느 날은 사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아무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던 이,
내 기분을 눈치채고 건넸던 짧은 한마디,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단단한 존재들.
그 사람의 눈빛이나 손길을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그렇게 나는 숨을 쉽니다.
그리고 상상합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부드러운 감각으로 감싸인 나를.
이 상상은 단순한 도피가 아닙니다.
외부의 충격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내면의 기술이자 힘입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도 기울어지지 않도록 내 마음의 구조를 단단히 세우는 ‘내력’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결국 ‘연습’입니다.
외력이 거세질수록, 내력은 더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하니까요.
문득,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 과장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항상 외력보다 내력을 세게 설계하지.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마음의 구조 설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을 지탱하는 구조물, 그 기둥 하나하나가
내가 떠올리는 안정감, 평온함, 따뜻함의 순간들입니다.
바람 불 때마다 떠올리는 ‘나만의 내력 자원’이요.
마음숲 커뮤니티 오픈채팅방에서 회원들께 여쭤보니
우 00 회원님은 배 후 갑판에 서서 스크루에서 나오는 하얀 포말이 푸르른 바다에
항적을 남기는 것을 보며 멍 때리기를 할 때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하시더군요.
이 00 회원님은 공원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이어폰으로 끼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 생기가 돋는다고 했습니다.
여 00 회원님은 서해안 변산반도 채석강 앞바다의 노을을 바라볼 때 마음이 충전된다고.
<오늘의 감정소리 듣기 :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방법 _ 상상력 기법>
감정은 상상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이 원리를 활용해 내면의 평정 상태를 연습해 봅니다.
회복탄력성 기술 중 ‘평정심’ 훈련은 감정의 폭주를 막고,
현재에 머무르는 힘을 길러줍니다.
상상은 가볍지만, 그 효과는 놀랍도록 깊습니다.
감정이 요동치는 하루 중, 단 몇 분의 상상이 당신의 하루를 지켜주는 평온한 방패가 되어줄 거예요.
나는 오늘도 내 마음에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나에게 평안함을 주는 풍경은 무엇인가요?
지금, 나를 가장 안전하게 해주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지금, 나를 다독이는 사람 혹은 물건은 무엇인가요?
하나씩 적어봅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그것들을 내 마음의 피난처 삼아 가끔 들러 쉬어갑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만의 닻을 내립니다.
상상이란 이름의 닻을.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