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연고

몸, 마음,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에세이 '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월요 조회 시간이었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뜨거운 햇살에 정수리가 익어가고 인중에

송글 송글 땀방울이 맺히는 순간,

집중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해서…”

“요점만 간단히 말하면!”

“핵심은 바로!...”


교장선생님께서 이 말을 세 번째 반복할 무렵,

내 앞에 서 있던 반장 녀석이 뒤를 돌아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찰나!

담임 선생님과 저는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10m 전방에서 내뿜는 콧김이 전달되는 듯한

흥분된 발걸음으로 제 앞에 멈춰 선 담임 선생님.


“김근하! 내가 떠들지 말라고 했지!”


입을 작게 벌리시고 하관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듯한,

텍스트 하나하나에 무게감이 실린 선생님의 목소리.

곧이어 선생님은 제 뺨을 엄지와 검지로

움켜쥔 채 정신없이 흔드셨죠.
그 속도는 ‘흑백요리사’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던

나폴리 맛피아 님이 웍을 흔드는 장면만치나

빨랐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순식간에 제 뺨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아이들의 시선은 꽂혔고,

마음에는 억울함이 피어올랐습니다.


‘함께 떠들던 반장은 왜 혼내지 않는 겁니까!’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을 이끌고 하교하던 날.

뒤꿈치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양 질질 끌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다 골목 어귀, 낯익은 연립주택 간판이 보이고,

우리 2층 집이 보이자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을 막 오르려던 그 순간,

코끝을 간지럽힌 달콤한 향기!

‘혹시… 카스텔라?’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죠.


“어서 손 씻고 와서 카스텔라 먹어라.”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니, 엄마는 카스텔라와 함께

냉장고에서 시원한 삼육우유를 따라 주셨습니다.

갓 구운 카스텔라 한 조각. 포크로 먹으면

카스텔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손으로 뜯어 호호 불어가며 먹어야 제 맛이거든요.

따뜻한 빵과 차가운 우유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제 안의 억울함과 슬픔도 함께 녹여주는 듯했습니다. 말이 필요 없었죠.

그날의 따뜻한 카스텔라는, 제 감정에 안정감을 주는 미각의 위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저는 미각을 통해 감정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먹는 것이죠.

억울했던 그날, 엄마의 카스텔라는 한 간식이 아니라

제 마음의 허기를 채워 준 감정의 닻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따스한 음식을 먹고 마시며

마음을 회복하는 기술을 익혀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미각 앵커링(Taste Anchoring)’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냄새, 맛, 온기를 통해

과거의 감정 상태로 즉시 이동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용기가 되며 지금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카스텔라는 단순한 빵이 아니라 ‘슬픔을 토닥이는 온기’의 자원이 되었습니다.


김훈 작가의 책, ‘자전거 여행’에서 미각의 온기를 맛본 순간도 있었죠.

“냄새만으로 냉이 국이란 걸 알아맞혔다.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속에서 새로운 천지를 열어주었다.

겨울 동안의 추위와 노동과 폭음으로 꼬였던 창자가 기지개를 켰다.

몸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서 봄 풀이 돋는 것 같았다.”


창자가 기지개를 켜고 마음의 응달에 햇살이 내리쬐는 맛이라니요!

당장 마음에 스토브를 켜 줄 냉잇국을 끓여 먹고 싶어 지더군요.









예능 프로그램도 하나 소개하고 싶네요.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배달의 무도’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정준하 씨는 가봉으로 이민 간 아들에게 한국에 사는 어머님께

전수받은 요리 비법으로 직접 만둣국을 전했습니다.

만둣국을 한 입 먹고는 주인공 상철 씨는 정준하 씨 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생각이 딱 나네.

이 만두를 참 잘해 주셨거든요.

황해도가 고향이셨는데 맛이 아주 좋은데요?

정준하 씨가 이렇게 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만두… 어머님이 해 주신 겁니다.”


“저희 어머님이 해 주신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해 주신 거라고요?”


“이 김치도 어머님이 직접 담가 주신 거예요.”


가봉에서 먹게 된 그리운 어머니의 밥상.

상철 씨가 좋아하는 총각김치와 되비지 찌개까지 챙겨 주신 어머니.

눈물을 들킬 세라 다시 한입 크게 입에 넣으며

유년 시절의 맛 그대로를 느꼈던 상철 씨.

목울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감동을 온 마음 담아

정준하 씨께 표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 가득한 만둣국의 온기가 눈동자에 가득 차올라

눈물이 맺히고 한 입 먹을 때마다 눈물을 훔치던 그의 모습에서

음식이 주는 위로의 힘을 느꼈습니다.


당신에게도 마음의 응달을 햇살로 데워주는 음식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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