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소희가 어두워 보여서 싫어

싫고 좋음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마음을 돌보는 방법

"난 한소희가 어두워 보여서 싫어."

"무엇을 보고 어두워 보인다고 생각했어?"

"혜리는 밝잖아. 근데 한소희는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여. 그래서 싫어."


친구와 여행 중에 나눈 대화였다.

어두워 보여서 싫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들렸다.

내게는 한소희 씨가 한 번도 어둡게 보인 적이 없었고

학부모 상담 때 담임선생님이

딸에 대한 표현으로 들려줬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이자, 마음 아프게 들렸던 말이

"얘가 어두워 보여요."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가영이(가칭)은 좀 어두워 보여요.

수업시간에 창가를 바라보고

무표정하게 멍 때릴 때가 많아요."


'아... 선생님은 창가를 바라보고 멍 때리는 아이를

어둡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생각하다가

"수업시간에 칠판을 보고 집중해서 들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선생님이 원하는 봐를 말씀해 주셨다면 내 마음이 어땠을까?

혼자 생각했다.


마음 아픈 상담의 기억과 함께

친구와의 대화가 마음에 잔상을 남길 즈음

내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한 부분만 보고 자기만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 싫어.'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옳고 그름,

싫고 좋음으로 나누며 산다.

모두 자기 기준에서 나온다.


내향적인 나는 웃음소리가 큰 사람이 싫고,

청결이 중요한 나는 음식을 흘리면서 먹는 사람이 싫고,

약속시간이 중요한 나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싫고,

계획적인 나는 일정을 자주 변경하는 사람이 싫고,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중언부언하는 사람이 싫다.

싫은 사람 유형을 더 쓰라고 하면 더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멈추기로 했다.

쓰다 보니 미간이 좁혀지고 금세 마음이 불편해진다.

싫은 모습들을 떠올린 게다.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다 보면

싫고 좋음을 넘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선별하기도 한다.



문득 친구의 표현에

'한소희 씨는 억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 딸을

"아이가 어둡다."라고 표현했을 때,

'뭘 얼마나 안다고 우리 아이를 어둡다고 평가하는 거예요?'

항변하고 싶은 얘미의 마음으로 한소희 씨를 변호하고 싶었다.




하나 곧 알아차렸다.

'도긴개긴이네.'

나 또한 친구를, 선생님을

한 순간에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이토록 무엇을 '있는 그대로 보기'란 참 어렵다.

우리의 뇌는 보는 즉시 경험에 준해서

자리 잡은 내적모델로 세상을 해석한다.

생존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흑백논리에 준해서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래야 살아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삶이 매 순간 생존과 안전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는 조율과 협상이 필요할 테고

어느 순간에는 소통과 공감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몸에 '지금 위기 상황 아니야.' 알려주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싫고 좋음으로 나누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싫은 유형을 만날 때마다 화재경보기가 켜진 것 마냥

몸에 위기 신호가 혼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상황!


나 또한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을 테지.

'깔끔 떠는 거 싫어.'

'무뚝뚝해서 싫어.'

'깨작깨작 먹어서 싫어.'

배우자와 지인들이 알려 준

나에 대한 평가들.

타인의 평가를 쓰기만 했는데

내면에서 '억울하다'라고 아우성이다.^^;;

내 마음처럼 누군가도

나의 평가에 억울했을 테지.


이제는 누군가를 평가하는

'~해서 싫어'라는 표현대신

자기 이해의 관점으로 표현하고 싶다.

'아! 나는 청결한 걸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표정이 밝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아! 나는 안정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구나.'



'우리의 의식은 늘 어떤 종류의 특별한 관심과

욕망에 오염되어 있다.'

편향된 시선에서 벗어나

마음을 돌보고 싶다면

해석의 필터링을 알아차리자.


20260120_150430.jpg 사진출처. 한소희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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