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럭 원장님, 츤데레 원장님
"그래서 오늘 약을 드셨냐고요?"
닫힌 진료실 문을 넘어 대기실에도 쩌렁쩌렁 울리는 원장님의 목소리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나이 먹으면 죽어야지,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런다고 안 죽어요"
원장님은 그다지 친절한 의사는 아니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의사다.
원장님과의 인연도 어느새 10년이다
한 두 번 인사 정도만 나누었던 동네 의사가 어느 날 저녁을 사준다고 보자고 했다
막 치과를 개원한 이후, 우리 함께걸음은 내홍을 겪고 있었다. 당시 나는 많이 위축이 되어 있었고 격려보다는 공격을 많이 받고 있던 상황이라 원장님이 보자는 이유가 내내 마음에 걸려 편치 않았다. 더구나 꼭 혼자 나오라고 해서 부담스러운 마음에 핑계 대고 약속을 연기하려고(속 마음은 취소) 연락을 드렸다. 스케줄을 어렵게 조정해서 연기는 힘들다며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그날 저녁의 순간 순간을 떠올려본다.
'제주에서 왜 서울 왔는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등등
면접을 보는 듯한 단도직입적인 질문들. 너무 당황스러워 그 맛있는 투플 한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기억에 없다.
"우리 동네 활동가 중 한 사람에게 대학원 학비를 지원하려고 집사람과 의논했어요. 우리 집사람이 강이사를 추천해서 오늘 이렇게 보게 되었어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며칠간 온갖 긴장을 다 시켜놓고 마지막에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런 동네의사가 우리 마을의원의 원장님이 되었다.
대기실에는 어르신들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로 북적북적했다
"아이고 우리 원장님 아침부터 열일하시네"
원장님은 며칠 동안 변을 못 봤다는 한 어르신의 관장을 마치고 지금은 귀가 잘 안 들리는 또 다른 어르신을 진료 중이었다.
오늘 관장한 어르신은 관장액을 넣은 호스가 항문과 직장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변이 꽉 막혀 있어서
원장님이 손으로 변을 파낼 수밖에 없었다. 관장을 마친 어르신은 밝아진 모습으로 원장님에게 연신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아, 의사는 정말 극한 직업인 것 같다'
"원장님, 제주도 아버지가 백내장으로 안과에 갔더니 한쪽 당 600만 원짜리 시술을 하라고 했대요
아버지랑 어머니랑 시술 예약을 하고 왔다는데 너무 비싼 거 같아요"
"원장님, 아들이 잇몸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CT 찍어보고 이비인후과 가보라고 했는데 거기서도 안되면 큰 병원 가라고 했대요"
"요즘 강남 쪽 그런 안과들 많아서 검찰 수사 들어갔어요. 아버지한테 제주대학 병원 가라고 하세요"
"그거 감기예요"
급하게 상담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밤에도, 주말에도 전화나 톡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원장님은 확인하는 대로 밤이든 낮이든 응답해 주었다
원장님과 상담하면 뭔가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건강은 물론 업무, 개인사, 인간관계 등 온갖 잡다한 일들을 원장님과 의논하게 되었다.
'마을의원'은 주민들이 출자해서 만든 협동조합 병원이다.
장애인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주치의 병원을 만들자는 창립정신이 있는 협동조합이다 보니
조합원 중 10%가 장애인이다.
"제주도 가보는 게 소원"이라는 얘기가 원장님은 내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지역의사회 후원금을 장애인모임인 아띠에 연계해 6명이 제주도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누구 하고도 격의 없이 지내지만 원장님은 특히 장애인 조합원의 건강을 많이 염려했다.
마을의원을 쉬게 되었을 때도 제일 맘에 걸렸던 사람들이 장애인 조합원이라고 했다.
마을의원 의사로 온 후 원장님과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점심을 먹으면 설거지와 과일 깎기는 늘 원장님이 도맡았다. 과일도 얼마나 예쁘게 깎으시는지^^
그래서 얻은 별명 '황주부' 그러고 보니 원장님은 별명도 참 많으시구나^^
점심식사 후 차를 마시다 원장님에게 누군가 물었다
"엄마가 갑자기 치매가 왔어요, 자주 다니던 길을 잊어버리고 물건을 사고 돈 계산을 못하셔요. 너무 걱정돼요"
"치매는 그렇게 갑자기 진행되지 않아요, 뇌 검사를 해봐야 해요. 병원 가서 뇌 CT 찍어보세요"
깜짝 놀랐다. '치매는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 게 아니다' 어르신과 매일 만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치매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게 참 많구나' 성찰이 왔던 순간이었다.
검사결과는 원장님 말대로 치매는 아니었다. 뇌종양이었다.
질문했던 분의 어머니는 빨리 검사를 받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회복해 일상을 살고 계신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속정 많고 따뜻한 우리들의 원장님
올해 10월부터는 영월의료원으로 옮기셔서 가끔 마을의원이 휑해 보일 때가 있다.
남들은 버럭 원장님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겐 영원한 츤데레 원장님
금방 뵈러 갈게요~~
원장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