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수빈이
"엄마 안 가면 안 돼?"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울먹이던 아이의 눈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
아들 셋을 낳고 육아에 허덕일 때 의도하진 않았지만
큰 아들은 시댁에, 둘째 셋째는 친정에서 키우게 되었다.
한 살 터울씩인 아들 셋의 육아는 나를 지치게 했고 영혼은 메말라 가는 기분이었다.
친정 부모님은 그런 내가 안쓰러워 나보다 더 많은 시간 아이들을 돌봐주었고
밤에는 내가 한 잠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두 아들 모두 부모님 방에서 재우곤 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었을 때
친정 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겨놓고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함께걸음의료생협 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으나 제주에 자주 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여동생 결혼식이 있어,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제주로 내려갔다.
나를 보자마자 수빈이는 "엄마 서울 언제 가?"부터 물었다.
"열밤 자고 갈 거야"
"와~~ 신난다"
아이들은 안심한 듯 잔칫집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빚 독촉하듯, 돌아갈 날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고 내 마음은 그리움으로 벌써 미어지고 있었다.
눈치가 빤한 수빈이는 하루 종일 내 옆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빨래를 개키고 있는데 내 주위를 왔다갔다 하던 수빈이가 슬쩍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엄마 안 가면 안 돼?"
울먹이는 아이의 눈이 내 눈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때 그 기억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이 마음에 담겨 아직도 문득문득 나를 찾아오곤 한다.
그때마다 내 가슴은 똑같은 무게로 무너지고 또 무너져 내린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 절대 너희와 헤어지지 않을게. 엄마를 용서해'
그렇게 나를 울렸던 수빈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제일 먼저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만난 지 200일이 조금 넘었다는 여자친구.
오늘 수빈이는 여자친구와 함께 나를 만나러 노원으로 왔다.
일기예보에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다.
약속 장소는 맛집을 인증하듯 입구부터 북적였다.
들어서는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 녀석, 수빈이었다.
나를 기다렸다는 듯, 쑥스러움 반 기대 반이 담긴 반달 눈웃음.
그 웃음을 따라 내 눈길이 가 닿은 곳은 수빈이 옆자리였다.
긴 머리의 여자친구.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 애의 수줍은 미소가 참 고왔다.
여자친구의 이름은 혜령이었다.
작고 이쁜 꽃다발과 예쁘게 포장된 꿀을 수줍게 내밀었다.
'어머나 감사해라. 나는 미처 준비를 못했는데...'
수빈이는 "가게를 다 털어왔어요" 하며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내가 좋아하는 '곤약젤리'였다. 노원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나의 최애 젤리를 사 왔나 보다
참 행복했다.
밥을 먹으며 혜령이에게 물었다
"수빈이의 어디가 좋았어"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잘생겼어요 ㅎㅎㅎ"
"수빈이는 혜령이의 어디가 좋았어?"
"전부 다요 ㅎㅎㅎ"
ㅎㅎㅎㅎ
점심을 먹고 근처 북카페로 이동했다.
만석이라 테이블석은 포기하고 노트북 펴놓고 공부하는 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의 대화가 노출되는 게 살짝 신경 쓰이긴 했지만
즐거운 수다는 곧, 주위를 삼키고 우리만의 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커피와 빵이 나오자 수빈이가 "혜령이가 엄마 하는 일을 궁금해해요"하고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20년 동안 우리 부모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일.
공동체를 얘기했고 가치를 얘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보람과 행복도 얘기했다.
마지막에는 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엄마는 20년 동안 이 일을 했단다.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일을 하기 위해 포기한 것도 많았어.
그중 가장 큰 포기는 아이들과의 시간이었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려고 많이 노력해 왔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20년이 지났네"
얘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마주한 수빈이와 혜령이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가벼운 수다로 시작해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야기까지.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눈이 내리기 전에 애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여기 있는 책 중에 읽고 싶은 책 골라봐. 엄마가 선물할게~"
"정말요?" 좋아라 책코너로 뛰어가는 두 녀석을 바라보는데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수빈이 여자친구와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두 번째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수빈아.
엄마가 많이 많이 미안해.
그리고 많이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