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휴센터 이야기

동그라미

by 물결

모처럼 일이 없었던 휴일. 느긋하게 누워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별로 활용하지 않았던 sns 메시지가 들어와 있길래 망설이다 열어보았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예전에 함께걸음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함께걸음)에 근무했던 작업치료사의 지인이었으며

현재는 제주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다.


77세의 친정엄마가 노원에 혼자 살고 있어서 엄마가 의지할 곳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며 조합 가입 절차를 문의하였다.

그 분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온통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이 분 어머니에게 동그라미가 있으면 참 좋겠다’


노원어르신휴센터에는 동그라미가 있다.


20년을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잘 모르고 지내던 분들이 ‘바르게 걷기’와 소모임을 하면서 이제는 매일 서로의 집을 오갈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각자의 집에 초대해서 함께 밥도 먹고, 자식들이 뭐라도 보내오면 다 불러서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혼자 사는 엄마의 집에 동그라미가 모인다고 하면 자식들은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배달시켰다.


동그라미 중 한 사람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군가는 반드시 아픈 어르신 자식에게 전화하여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하게 하거나 집에 방문하도록 일러주었다.


동그라미는 이제, 어르신들이 이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고, 자녀들에게는 언제든 엄마의 안전을 묻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이웃이 되었다.




2025년 12월 02일 화요일 오후 5시.


오늘은 우리 집에서 ‘한끼밥상’을 해보았다.

어르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카레덮밥’을 만들어 저녁 식사로 대접을 해드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달님이 어르신과 평소에 동그라미를 부러워하는 해님이 어르신도 함께 초대를 했다.

오순도순 모여 앉아 식사를 하면서 “새로 이사 왔으니 이제는 함께 재미나게 지내요”

“이렇게 불러주니 너무 감사해요. 친하게 잘 지내요”

“다음엔 우리 집도 놀러 와요”

“나도 꼭 불러줘요”

서로 공감하며 식사를 하니 내 마음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식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르신들의 뒷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후에 달님이 어르신 따님이 감사하다고 전화가 왔다.

카레덮밥과 동그라미


2025년 12월 09일 화요일 오후 3시.


오후에 꽃님이 어르신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동그라미 어때요? 우리 아들이 이웃들과 나눠 먹으라고 떡볶이랑 어묵탕 재료를 가져왔어요”

슬슬 모일 때가 되었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모일 구실을 만들어주시는구나 생각하면서

동그라미 모두에게 전화를 돌렸다.

“3시에 구오다방(905호)으로 오세요~”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오후 3시.


겨울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오늘은 ‘동그라미 모이자~’ 연락을 안 해도 오후가 되자 구사다방(904호)으로 모두 모이셨다.

아껴두었던 옥수수가 간식으로 나왔다.

이렇게 함께 먹으니 세상에 이런 별미가 따로 없었다.

때마침 4층으로 이사 온 달님이 어르신이 들어오시며 “심심한데 여기 오면 재미나” 하셨다.

다들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날씨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로 굽이굽이 넘어가고 있었다.


904다방에 모인 동그라미 어르신들

(위 글은 어르신휴센터 밴드에 올라온 박옥* 리더의 글을 발췌하였음/어르신 이름은 가명처리 하였음)


며칠 전에 방문진료 나갔던 마을의원 원장님이 한 어르신의 사례를 보내왔다.


인지증(치매)이 있지만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살고 있는 어르신이었다.


먼 친척 조카가 이 어르신의 유일한 가족인데, 집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는 어르신과 달리

조카는 12월 말에 어르신을 요양원에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원장님은 어르신휴센터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없겠냐고 물어왔다.

당장은 요양보호사와 함께 바르게 걷기에 나오시도록 하였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바르게 걷기 참여 어르신이 요양보호사가 없을 때 들여다 봐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바르게걷기에 나오면서 이웃이 생기고 그 이웃들이 가끔 어르신의 집에 놀러도 가고

만약 그 어르신이 집을 못 찾아 공원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이웃들은 그 어르신의 손을 붙잡고

그리운 집으로 모셔다드릴 것이다.


상상 속의 어르신은 내 집에서 그렇게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돌아보니 어르신휴센터는 나의 사심에서 시작되었던 같다.

준비 없이 맞이하는 노년이 불안하고 겁이 나서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나의 노후를 준비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심에서 시작된 어르신휴센터에서 나는 동그라미를 만났고, 동그라미는 나이듦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해주었다.


동그라미가 많아지는 동네를 보면서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동그라미가 더, 더, 더 많아지는 우리 동네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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