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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잎 Nov 04. 2018

엄마의 파업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빨래를 해주거나 청소를 해주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깨달았다. 원래 하던대로 그대로 있으면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노동의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 봐. 내가 노동하지 않으니 많이 불편하니? 그러니까 내 노동에 이제 가치를 부여해줘.”라는 물음들.


뭐든 자동적으로 되는 건 없다. 자동적으로 빨래가 되고 청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거였다. 


나도 집안일 따위는 안하고 고양이처럼 살고 싶다. 저렇게 널부러져서.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사랑의 의미를 파고든다. 이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냐, 얼마나 지속적일 것이냐, 얼마나 힘들고 한심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유지하느냐 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황폐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한줄기 사랑이 내려오는 건 다른 일이다. 그때의 사랑은 흔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황폐한 곳에 피어난 한줄기 빛 같은 것이다. 그 빛이 얼마나 환하게 반짝이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반짝일지를 생각하는 것은 황폐한 자에게는 사치다.


새삼 알았다. 나는 사랑 안에 놓여져 있었다가 사랑 밖으로 뛰쳐 나갔었다. 서울이란 거대한 도시를 벗어나 작은 도시에 정착해 익명의 존재로 살았다. 아무것도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채 모든 걸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도시에 머물다보니 내게도 한줄기 사랑이 내리쬐면 그것에 그만 감격하고 만다. 




일주일 간 쉬었다. 쉬면서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 몇 명을 만났다. 우습게도 20대엔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에게 불평이 많았다. 누군가는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고, 누구는 소홀한 것 같았고, 누구에겐 배울게 많았고, 누군가는 날 더 이해주는 것 같았으며. 서로를 비교하면서 이상하게도 서운함을 생각했다. 황폐한 자로 살다가 친구를 만나니 우정이 새삼 소중하다. 


내 생활영역에서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을 이렇게 일주일 동안 만날 수 있다니. 하루종일 시간을 내어 함께 놀고 얘기하고 웃고 먹을 수 있다니. 이런 시간들에 나는 아무런 해석도 달지 않았다. 황폐한 인간에 들어오는 사랑은 그야말로 빛이었으니. 


사람은 적당히 황폐해볼 필요가 있다. 가끔 사람들이 파업을 하는 것처럼. 가끔 황폐해지면 원래 나는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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