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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잎 May 10. 2019

영화 ‘논-픽션’을 보고.

제목에서부터 스포일러가 강하게 느껴진다. 논-픽션. 논픽션도 아니고 논-픽션이라고 한다. 

허구라는 것인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인지,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뭘까. 영화는 그 사이에 위치해있다. 허구와 실제 사이에.


여배우로 나오는 줄리엣 비노쉬.

두 커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한 커플은 여배우와 출판사 대표. 다른 커플은 남자 작가와 국회의원의 여비서다. 


출판사 대표는 작가의 글을 읽고 편집하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이 두 커플은 엮여있다. 비즈니스적으로도 그렇고 애정관계로도 그렇다. 


프랑스 영화는 한국영화와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이번 영화를 통해서 확 느꼈다. 한국영화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는 것을 아내가 알게 됐다면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감정의 지속성과 변화를 그려낼 것이다. 슬픔, 분노, 좌절 등을 겪으면서 아내는 내면의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식의 전개가 그려진다. 아니면 처절하게 복수를 감행하거나.  


프랑스 영화는 이와 다르다. 주인공들은 바람을 피지만 감정의 변화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들은 감정은 배제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을 그려내어 인간의 성장을 보여준다거나 하면서 한국 영화처럼 어떤 의미를 짚어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영화에는 의미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개인적 성장도 없고 어떤 감동도 없다. 프랑스 영화는 대체로 이런 식의 서술을 즐겨하는 것 같다. 그들은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아간다고.'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 사회의 모습이라고. 바람도 피고 잠깐 슬프기도 하고 논쟁도 하면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


줄리엣비노쉬의 남편으로 나오는 출판사 대표.

의미를 억지로 찾아서 떠먹여주는 한국영화와는 달라서,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다가도 영화를 볼수록 모든 영화가 클라이막스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정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위해 스토리와 장면이 쌓여가는 것이 영화 유일한 서술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계속 흘러가는 영화도 있다. 그러면서 영화에 몸을 맡기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특이한 것은 프랑스인들의 대화 내용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성이 매우 강해서인지 ‘좋은게 좋지’라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입을 다물지언정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논리를 더 깊게, 그리고 더 뾰족하게 만들어나갈 뿐이다. 그러나 대화는 그렇게 날카롭게 나누면서도 몸짓에는 애정이 묻어있다. 몸으로는 배려를 하고 행동으로는 애정을 나눈다. 그런의미에서영화에는 신기한 장면이 많았다. 


남자작가와 그의 아내.

한국영화에서는 흔히 이런 것이 ‘허세’처럼 보여진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면서도 대화는 그 반대의 것을 취하면 허세를 부리거나 있어보이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된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보편적인걸까? 그저 이들은 정말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또 배우가 멋지면 일단 마음이 간다. 난 줄리엣 비노쉬를 좋아해서인지 처음부터 마음이 갔다. 


직업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사생활을 팔아먹고 사는 직업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시사점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작품으로 풀어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읽을거리에 그치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그것을 통해 예술성과 그리고 오래 기억해야할 어떤 것을 담아내는 걸까? 정말로 작가는 무엇인가, 그리고 문학은 무엇인가, 그것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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