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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잎 Oct 01. 2019

구원이 되어줄 수는 없지만. 영화 '뷰티풀 보이'.

최근 영화 뷰티풀보이를 봤다. 마약에 찌든 인생을 묘사한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살아있어도 이미 죽은 사람이다. 마약 중독자를 둔 어미는 그렇게 말한다. 원래 예쁜 아이였다고. 그런데 살아있는 아이가 살아있지 않다고. 그 아이는 살아있지만 내가 알던 그 예쁜 아이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약중독자를 아들로 둔 어미가 아들을 마약과다로 잃게 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살아있는 그를 보면서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깊이 애도해왔다. 그의 육체적 죽음은 사실 오래해 온 애도가 실제로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마약은 인간성을 말살한다. 인간이 원래의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든다. 마약에 찌든 인간은 그저 쾌락에 젖어있다. 생각도 못하고 활동도 못하고 제대로 된 의사표현이나 감정표현도 하지 못한다. 


나는 가끔 기사에서 약물과다로 유명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볼 때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약물이 뭔지, 약물과다가 뭔지도 알 수 없었는데 '뷰티풀 보이'를 통해서 그 무서운 현실을 보게 됐다. 마약중독자는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온통 취해있는 상태에 놓인 어떤 육체에 불과한 것이다.


친했던 부자지간.

주인공인 마약중독자(티모시 살라메)의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쓴다. 이곳 저곳 다니면서 조언을 구하고 아들이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미국지역을 같이 쫓아다닌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노력들이 아들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깨닫는다. 그 좌절을 통해 나로 인해 아들의 구원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결국 좌절하고 그리고 포기한다. 아들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마음이 아팠다.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의 구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애처롭게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는 자를 보는 것도 안타까웠다. 마약에서 정말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자를 보는 것은 슬프다. 그렇지만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에도 슬픔이 묻어난다. 구원을 바라는 자와 구원을 해줄 수 없는 자의 슬픔이 온통 영화였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인간은 구원으로 가는 길은 제시하고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인간 그 자체가 구원이 되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마약중독이라는 아주 무서운 병, 영화에서 그것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는 것도 좋았지만 사실성과 처참함의 묘사보다도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빠는 아들이 계속 망가져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한밤중에 일어나 아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비행기를 타려고 한다. 어디있는지도 모르지만 무작정 아들을 찾아나서려는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할수가 없다. 아들은 어디에선가 죽어가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한밤중에 공항으로 달려간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계속 해 나가야한다고 말이다. 그 말이 정답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는 아빠는 곧 화를 내고 절망한다. 다시 침대에 주저앉으나 그럼에도 현실을 직시한다. "나는 아들의 구원이 되어줄 수 없다. 그는 죽을 것이다." 라는 것을 말이다.


행복한 가족이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가끔 찾아오던 공포는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나의 우산이자 그늘이 되어주는 분들이 갑자기 돌아가실 것 같은 두려움은 실제 어떤 징후가 있거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공포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부모의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공포를 느끼는 것은 내 존재를 부모의 존재 위에 두고서 생각하고 있었고 나만의 세상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부모님이 만들어준 세상이 내게는 지지이자 버팀목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부모님도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는 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를 제외하고 그리고 나만의 세상을 이룰 수 있는 지지층이자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러한 구원을 찾아 나서는 구도자의 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랜 방황과 사춘기를 겪은 뒤에야 비로소 부모의 부재를 공포가 아닌 슬픔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 뷰티풀보이에서 마약중독자인 주인공은 죽음에 거의 가까이 이르러서야 살아갈 의지를 강하게 잡는다. 인생이 심심하고 못 견딜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마약에 손을 대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쾌락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마약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된것이다. 


그는 자신의 코앞에 있는 죽음이라는 엄청난 공포 앞에서야 비로소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아빠는 이미 아들을 놓은 상태였다. 그는 오랜 좌절을 겪으면서 '아들이 살아있음에도 이미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가 된 뒤였다. 그는 아들에게 나는 네 구원이 될 수없노라고 말하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마지막 장면.


그럼에도 아들이 마약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강한 의지때문이었다. 이제 살아가겠노라, 나는 내 일상을 그리고 내 인생을 받아들여 살아가겠다는 그 의지로 몸을 한번 일으키자, 그제야 그는 눈을 뜬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따뜻한 사랑이 자신을 향해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두 부자는 나란히 앉는다. 주인공은 아빠의 옆에 앉아 부끄러움과 좌절감과 미안함이 엉켜있는 울음을 쏟아내고 아빠는 그의 등을 두드린다. 아빠의 등 두드림은 이렇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구원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네 옆에 언제까지나 있어주겠다"는 마음이 담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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