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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잎 Oct 06. 2019

영화 조커, 끔찍함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모순은 뭐지?

영화 조커를 봤다. 한마디로 너무 좋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정말이지 여전히 좋다. 얼마전에 나왔던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는 근육돼지로 나왔는데 이렇게 비쩍 마른 몸을 갖고 있다는게 신기했다. 나는 다이어트가 하기 너무 힘든데. 이분은 어떻게 이렇게 몸을 자유자재로 늘렸다가 줄였다고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호아킨 피닉스를 보고 처음 반했던 영화는 '투러버스'였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절절하고 갈등상황이 많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 이 영화는 정말 그랬다. 호아킨피닉스와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갈등상황이 생기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어찌나 절절하게 연기를 잘하는지. 내가 다 우울하고 처참해질 노릇이었다. 딜레마에 빠진 인물을 정말 탁월하게 그린다. 


그 다음에 좋아했던 영화는 '마스터'였다. 마스터는 종교적인 상황에 빠져드는 인물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도 호아킨 피닉스가 정말 연기를 잘한다. 그는 특유의 괴팍함과 절절함과 슬픔과 좌절감 등을 제대로 연기하는 느낌이 든다. 영화에 임하는 순간에는 영혼을 탈탈 털어서 그 영화의 캐릭터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 조커에서는 호아킨 피닉스가 극의 중심을 이끌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연기가 아주 중요하다. 영화의 전개는 조커 한명을 놓고 진행된다.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부차적이다. 그들은 조커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고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주인공은 조커 한명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쉬웠다. 복잡한 상황이 펼쳐지기보다는 조커 한명을 놓고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커의 일생은 대체로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과거의 일들이 밝혀지기는 하지만 이것도 대체로 이해하기가 편안하다. 


영화 조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 같은 캐릭터가 왜 탄생하게 됐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그렇기에 사이코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괴하고 끔찍한 행위를 묘사하지만 그것을 잔인하고 끔찍하게만 묘사하지 않고 미학적으로 표현한다. 조커가 저지르는 끔찍한 일은 그의 인생을 쭉 따라가고 있는 관객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소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끔찍한 일 뒤에는 조커의 아름다운 춤동작이 따라 붙는다. 그의 끔찍함과 아름다운 춤 동작이 함께 묘사되는 이유다.  


영화가 이런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예술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도 처음에는 폭행, 살인 행위가 나오고 나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슬픔, 절망, 분노의 감정을 묘사한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런 무기력함과 절망과 분노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런 행위는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마치 이런 행위가 인생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묘사되고, 그는 악의 상징을 넘어서 저항의 상징, 영웅이라는 상징으로까지 떠오르게 된다.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지점이 굉장히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저 경제적으로 빈곤한 남자가, 불친절함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것을 마치 영웅의 탄생처럼 묘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가 영웅으로 치켜세움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현재 사회에서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이기주의가 더욱 심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실제로 벌어지는 현재의 모습을 영화에서는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심해질수록 조커 같은 싸이코가 영웅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극으로 치닫는 일들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한 인물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고 있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있는데 표현방식도 아름다운 것이다. 표현 과정에서 한 명의 인물이 보여주는 끔찍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은 지독히 아름다운데 실제로 살인자가 이런 일들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을 통해 모순과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적 시각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사실 현실에서 그러한 모순들을 지속해서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어떤 명확한 이유나 상태로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그 모순점이 인간의 사랑 결핍이나 빈부격차 등의 이유라는 점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가 지니는 가치가 부각된다. 


그렇기에 영화를 한바탕 재미있게 보고 난 뒤 뒷맛은 개운치 않다. 어떤 찝찝함이 남는데 이것이 사회의 부조리함 때문일텐데 이것은 영화가 단순한 오락거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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