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본 것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애들은 여전히 그애들 그대로 존재했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었다.
우리는 몇년 만에 만나서 생각나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의 고민에 친구는 "너는 능력이 있어서 다른 데 갈 수 있어도 워낙 잘하니까 더 있어도돼"라고 받아줬다. 그것은 내가 회사에서 받고 있는 대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회사 상사에게 받는 마음에 들지 않음을 대놓고 얘기하는 것, 모욕과 인격모독 같은 것들은 내 안에 깊은 분노가 자라게 했다. 나는 항상 '이 회사를 어떻게든 망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해왔다.
내 친구들은 나를 대우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강한 분노에 속해 있다가 친구들의 사랑안으로 넘어왔다. 우리들은 친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서로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진심이 담긴 눈과 말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지 못한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내가 느끼는 행복함은 오롯에 내것이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은 회사에 몇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준다.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로우면서 노동을 파는 것보다 내 시간을 파는 것이 더 괴롭다고 느꼈다.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에 놓여있어야한다는 사실, 그 시간에 내 자유의지가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감정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괴로웠다.
나는 '존재'냐 '소유'냐 딜레마에 한없이 빠져있다. 나는 늘 소유하기 위해 바쁘다고 생각했다. 어떤 소유들 말이다. 재산 뿐 아니라 학벌이라는 타이틀, 근사한 직업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실제적 소유를 한없이 추구했다. 내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느냐, 내 이름으로 된 재산은 무엇이 있느냐 등등 말이다.
그러나 가끔은 소유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순간에 느끼는 소중함 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느끼는 존재함인 것이다.
내가 늘 나의 고양이에게서 느끼는 그것, 그것은 소유보다 존재였는데 이것은 고양이를 비롯해 내 친구들도 내게 선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행복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서는 고양이와 함께 누워서 잠을 잤다. 친구들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행복함을 다시 선사했고 고양이는 귀여운 존재 자체로 내 옆에 있어주면서 내게 행복함을 선사했다.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보다는 가끔 그저 그냥 그렇게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도 나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