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설산으로 간다

괜찮다, 괜찮다.

by 티니Tini

뉴욕, 홍콩, 파리, 도쿄, 시드니. 다시 한번 눈을 돌려 왼쪽부터 뉴욕, 홍콩, 파리, 도쿄, 시드니. 지금쯤 시드니는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다시 한번 눈을 돌려 회백색 콘크리트 벽에 걸린 시계들을 쳐다봤다.


출근길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청량리행, 광운대행, 소요산행 등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는 5분마다 한 번씩들어오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숨이 콱 막히는 아침을 생각하면 전날부터 심장이 쿵쿵대 잠이 오지 않았다.


줄줄이 오는 열차들을 몇 대를 보내고 겨우 겨우 2-1번칸에 몸을 욱여넣고 시청역에 내렸다. 지각할 뻔한 날이었다. 뛰어오느라 씩씩거리는 나를 뒤로 하고 어떤 선배 하나가 지하철 칸에 발 하나 들이밀 틈만 있으면 탈 수 있다고 다음부터는 발을 좀 더 깊숙이 들이밀어보라고 말해주었다.


선배의 말 대로 발을 깊숙이 욱여넣어 볼 까도 고민한 아침이었지만, 문이 열리면 마주하는 승객들의 짜증스러운 눈썹들, 앞으로 들어가라고 밀어대는 사람들의 뜨거운 입김들을 버틸 자신이 내게는 늘 없었다.


입사 초반에는 유독 출력 실수가 잦았다. 인쇄 장수를 잘못 입력하거나, 양면 복사를 단면 복사로 착각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프린터기가 뱉는 종이들을 모조리 집으로 숨겨 가져갔다.


사무실에서 이면지로 써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왜 이 코딱지만 한 집에 짐을 늘리냐는 친구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쉬운 복사 하나 제대로 못하는게 너무 창피해서, 꼼꼼하지 못한 게 약점이 될까 자꾸만 미니백은 숄더백이 되고, 에코백으로 부피감을 늘려갔다.


10분 뒤에 검사를 시작한다는 간호사의 팔랑거리는 손짓에 쓸데없는 생각들을 지우고 걸음을 재촉해 검사실로 간다. 흰 도화지 위에 의사가 부르는 단어들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물고기, 사람, 산.


산 한가운데 놓여 있는 새하얀 욕조에 갇힌 시뻘건 잉어들. 물이 다 빠져 퍼덕이는 몸짓. 꾸르륵 물이 내려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들. 말라버린 잉어들.


벅벅 도화지를 채우던 손을 멈춘 건 반대편의 의사였다. 의사가 더러워진 내 소매를 잡아 들어 올리니 옆에서 간호사가 분주히 물티슈를 찾기 시작한다.


한쪽으로는 내 팔을 잡고 한 손으로는 내 그림을 잡아드는 의사. 그림을 보던 눈을 돌려 잠시 내 눈을 빤히, 아주 빠안히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퉤 하고 침을 뱉고 싶다고 생각한다.


삽시간에 일그러지는 의사의 얼굴에 놀란 간호사가 달려와 물티슈를 건네니 얼굴을 벅벅 닦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는 의사. 이러시면 안 된다고 달려와 잔소리하는 간호사를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


노려보는 눈이 눈덩이를 만들고, 사나운 눈이 폭풍 같은 눈보라를 만든다면, 감는 눈으로 덮을 수 있을까? 덮는 눈으로 감을 수 있을까?


1호선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병원 로비에서도, 검사실에서도 나는 그날의 한라산으로 간다.


추위에 이를 달달 떨며 올라와 친구 A와 함께 먹은 매운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설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말도 없이 조용해지던 우리들의 순간들은 얼마나 즐거웠었는지를 떠올린다.


팔이 젖어오는 느낌에 눈을 뜨자, 흰머리가 가득한 정수리가 보이는 늙은 간호사가 구시렁대며 소매를 닦아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입는 건데 이렇게 더럽히면 안 되지.”

“저 이제 퇴원해요?”

“퍽이나. 의사 선생님 얼굴에 침이 세 번째야. 어떡하려고 그래.”


시드니, 도쿄, 파리, 홍콩, 뉴욕.. 다시 한번 오른쪽부터시드니, 도쿄, 파리, 홍콩, 뉴욕..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생각하며, 새하얀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잉어를 몇 마리 더 그리기 위해 아주 시뻘건 색이 필요했다. 잉어들이 다 같이 물티슈를 뱉어내면 욕조가 막힐 수 있으므로 그리지 않기로 했다.


설산의 고고한 순백함을 담기 위해서는 물감도 필요할 것 같았다. 인간이 만든 물감보다 아무래도 자연의 선물인 뽀얀 눈이 나을 것 같았다.


“잡아!! 잡아!!”

“눕혀!!!”


소리를 질렀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찾으려던 것뿐인데. 눈은 찾았나,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소리를 질렀던 것뿐인데. 다시 눈을 감아야 한다.

설산으로 가니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하며 눈을 덮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흰색 운동화와 스니커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