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응
응응. 하는 연의 고저 없는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맴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연인의 사근사근한 재촉에 돌아눕는다.
'연이, 듣고 있는 거야아?'
'응. 그럼.'
'내가 뭐라고 했는데?'
'출근길엔 간발의 차로 급행을 놓쳤고 점심시간엔 밥 먹다가 셔츠에 흘렸고 그리고...'
연은 한 시간가량 반복되는 연인의 얘기를 지겨운 티 하나 없이 듣는 중이었다. 혼자 있으면 한 시간에 세 마디는 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편이라 참새 같은 연인의 지저귐은 연을 즐겁게 했다. 어떻게 하면 매번 다양한 사건, 사고를 몰고 오는지 신통할 따름이었다.
'저는 스스로를 말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말이 많은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보통 이 정도는 말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떠세요?'
‘아, 말이 많구나.’
첫 번째 만남은 우연한 계기로 인한 소개팅이었다. 절친한 친구가 자신의 소개팅 자리와 약속 장소를 헷갈려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친구가 불러내 도착한 카페에는 친구 대신 그녀가 자리했고 그녀는 사과하고 돌아가려는 연을 붙잡고 말을 걸어왔다.
이것도 인연인데 커피 한 잔 하실래요, 하고. 소개팅, 미팅, 과팅 등 팅으로 끝나는 걸로는 회사 미팅 말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연에게 그보다 어색한 자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돌아가려는 했었는데 상대편에서 비슷한 말을 해왔다.
'사실 저도 소개팅은 처음이거든요. 아니 팅으로 끝나는 건 뭐 해본 적이 없어서요. 소개팅, 미팅, 과팅.. 파이팅 말고는 하하. 친구들이 잔뜩 후기를 기다려서 그러는데 잠깐 앉았다 가세요.'
잠깐 앉았다만 가야지 싶던 게, 10분이 되고, 대화 10분 만에 그녀를 한번 더 보고 싶어 졌고 대화가 끝날 무렵엔 서로 입맛에 맞는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근데 그때 왜 안 도망갔어? 난 내가 너무 아무 말이나 해서 연이 도망갈 줄 알았는데'
'난 더 듣고 싶어서, 네가 계속 말을 하고 있었잖아.'
'그래? 연이가 계속 응응만 하길래. 재미없는 줄 알았어. 난 상대가 마음에 들면 너무 아무 말이나 하게 돼.'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이라도 하면 얼굴에 바로 티가 났고, 어쩌다 실수하면 바로 사과할 줄 알고 어딜 가나 밝게 인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면서 한 말에 가끔은 웃어넘기지 못하게 상처받고 집 가서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또 다른 친구들 만나면 금방 잊어버리가도 다시 돌아서면 그 생각에 우울해지는 것도 그녀였다.
'아무 말이 뭔데?'
'어, 음. 그러니까 생각나는 대로 의식의 흐름과 관계없이 말하는 거'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건데 아무 말이야?'
그녀는 연의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마주한 연의 품에 안긴 채로 자신만의 세계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연은 한 손으로 폰을 타닥거리며 틀어뒀던 재즈 뮤직의 볼륨을 높여본다. 연의 연인은 분명 짧게는 10분, 길게는 한 시간 뒤쯤 물어볼 것이다.
'나는 가사 있는 노래가 좋은데.'
연은 넘치는 리듬과 멜로디로 살랑이는 그녀에겐 더 이상의 가사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말을 삼키기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연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아무 말이니까.
연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그녀가 연의 손가락을 조물 거리기 시작했다. 거스러미 잘 정리된 짧은 손톱 끝을 살살 만져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손금을 간질여보는 애정을 담은 꾹꾹이에 기분이 좋아지는 연이다.
'생일엔 뭐 할까? 뭐 먹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거 있어? 어디 여행을 갈까? 아니다 편하게 호캉스를 갈까?'
'아, 응. 내 생일.'
'응, 연이 생일, 다음 주잖아. 근데 있잖아. 어디 책에서 읽은 건데 하루는 그런 날이 필요하대. 흰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잔뜩 낙서를 한 뒤에 찢어버리는 하루.'
연은 자신의 손이 둥글게 말리며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어느새 자신의 손에 꼭 맞은 연인의 손을 붙들었다. 여느 때처럼 노래하기 시작한 연인의 어려운 말을 설명해 달라는 듯이 다정스레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살면서 힘들고 외롭고 걱정되고 불안하고 아픈 마음들을 그려낸 다음 찢어내는 거지. 아픈 거 다 사라지라고.'
'그래? 스케치북인데 다음으로 넘기면 되지. 아깝게.'
'손에도 묻을 텐데 그렇지? 그럼 찢진 말아야겠다. 그럼 생일은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어. 다음장을 넘길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날.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든, 어떤 낙서를 하든 그저 나와 몇 시간 그림을 같이 그려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날. 그리고 그 다음장으로함께 넘어갈 수 있는 날. 응?'
파이팅만 해봤다는 3년 전의 그녀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연은 그런 날이 생일이라면 생일은 더 이상 제겐특별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응응.'
'응응이야?'
'응. 응응'
그녀는 연의 말을 매번 들어주고 있음으로, 저마다 다른 소리의 응응에 그녀는 이야기를 덧붙여주고 대화를재미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으므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의 이야기에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라는 따뜻한 이야기를 불어준 그녀를 만났으므로.
'노래 바꿔줄까?'
'응. 좋아. 연이 좋아하는 건 좋아'
연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춘 로봇처럼 고장 나는 감각을 발끝부터 느낀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로 바꿀까 했는데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좋다니, 한참을 망설이는 연이다.
'근데 연아, 만약에 여기에 가사를 붙일 수 있다면 어떤 가사를 붙이고 싶어?'
'응?'
'응 이라고? 응 응 응? 진짜 웃기겠다. 응 응 응 응'
연은 이번 생일엔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가득 든 케이크를 사러 대전을 갈 생각이었다. 줄도 서야 된다는데 몇 시부터 가야 되나, 같이 가자고 해야 되나, 서프라이즈로 해야 되나. 생각할수록 고민이 깊어지는 법이다.
'생일에 뭐 하고 싶어? 그때 그 딸기 케이크는 어때?'
'그건 내가 먹고 싶었던 거잖아. 연이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걸로 해야지. 자꾸 그러면 그냥 이렇게 누워 있을까?'
아무렴.
내년에 있을 그녀의 생일이 더 기대되는 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