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까지의 오해와 시간

by 팅커벨

10살의 우울로 인한 신체화부터 24살 봄의 조울증 판정까지, 나는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가난해진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보통의 가정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가난해졌다.

외할머니가 보내주시는 식량이 아니면 우리는 굶고 살아야 했을 거다.

나는 예민한 아이였고, 부모님은 일부러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가짜 자존감으로 나를 채웠다.

나는 몰락귀족이야. 귀족은 몰락해도 귀족이야. 평민과는 달라.

10살 때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건 13살 조증이 오기 전에도 이미 내 내면에 조울증의 소인이 잠재되어 있었다는 증거인 것 같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13살, 조증이 폭발의 형태로 나타나고, 애들과 그렇게 싸워댈 때 학교에서 나는 성격 나쁜 애였다.

집에서는 사춘기가 유독 세게 온 자녀였다.

고통과 우울에서 나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몸부림치는데, 양호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잦은 신체화로 매일같이 변기를 붙잡고 토를 할 때 가족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그건 걱정이 아닌 짜증이었다.

쟤는 또 아프네.

그런 시선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나는 신체화도 최대한 숨겼다.

병원에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꼬깃꼬깃 모아둔 용돈으로 약국에서 진통제, 소화제, 진경제를 항시 준비해 두고, 아플 때마다 약국에서 사 온 그 약들로 버텼다.


고등학교를 실업계로 진학한 후, 나의 폭발적인 조증양상은 좀 가라앉았다.

누군가와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내가 몸부림쳐도 아무도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는 포기였다.


그래도 꽤 착한 친구들이 많았고, 그 친구들은 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챙겨 다녀주었다.

화장을 하고, 교복을 줄이고, 몰래 술, 담배를 하는 학창 시절이었다.

여전히 가난했기에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충당했다.

성적이 좋았기에 그냥 꾸미기를 좋아하는 고등학생이라는 프레임을 쓴 상태였다.


다행히도 조울주기는 개학과 방학에 맞춰서 왔다.

개학을 하면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살고, 방학 때는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다.

나는 이 패턴이 당연한 줄 알았다.

부모님이 방학마다 내내 누워있는 내게 게으르다고 해서, 나는 진짜 내가 게으른 줄 알았다.


18살, 냉에 피가 묻어 나왔다.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배란혈이라고 했다.

그렇게 반년을 더 방치하던 어느 날 문득 이거 그냥 둘게 아닌데 싶었다.

그래서 여의사 산부인과를 검색해 혼자 산부인과에 갔다.

스트레스가 견디지 못할 만큼 심해서였을까.

지름 6cm의 난소종양이 있다고 했다.


엄마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나는 수술을 받지 않고 싶었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고통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빠르게 수술일정을 잡아 수술을 하게 되었다.


20살, 보건대에 입학을 했다.

태움이 심한 학교였다.

다시 조증의 폭발성이 나왔고, 선배들하고 소리를 지르며 싸워댔다.


그러다가 과호흡이 왔다.

숨이 내 마음대로 쉬어지지 않는, 곧 쓰러질 것만 같은 공포였다.

첫 과호흡은 어찌어찌 멈춰졌다.


그 이후로 과호흡이 오려고 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빨아들이며 들숨, 뱉으며 날숨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과호흡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내 담배의 의존도는 올라갔다.


보건계열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출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던 나는 첫 학기 1.071이라는 학점으로 간신히 학사경고를 피하고 휴학을 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주 6일,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 퇴근하고 나면 친구들과 나이트에 가서 춤을 추다가 막차시간쯤 되면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에 하루, 쉬는 날이면 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러면 오후 6시부터 내 전화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울렸다.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 친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또 집이야?”

가족들과 있으면 숨이 막혀서 집 밖으로 나오는 건데, 가족들은 집 밖에서조차 내 숨통을 조여왔다.


우리 집은 사람은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통제했다.

내 통금은 막차였다.

1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3일 연속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그 3일째 되던 날, 엄마가 말했다.

지금이 몇 시냐고. 네가 어른이냐고.

지금은 12시 30분이고, 막차 타고 들어왔고, 나도 이제 성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는 집을 나가라고 했다.

아마 협박이었을 거다.

나는 그대로 옷을 갈아입고, 1년 동안 돈을 모아둔 통장을 들고 집을 나왔다.

엄마는 지금 나가면 다신 들어올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덤덤히 옷들은 다 내 돈으로 산 거니 옷가지러 한번 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갔다.


그렇게 원룸을 구했다.

옷을 다 옮겨왔다.

가족들이 없으니 살 것 같았다.

그게 내 첫 극조증의 시작이었다.


밤만 되면 나이트나 클럽 오픈을 찍고 들어갔다.

오픈시간에 무료로 입장을 하고 춤을 추다가 아침 7시쯤 마감을 하면 나왔다.

마감 찍고 나와서는 술을 마시다가 집으로 귀가했다.


그럴 거면 집을 나가라던 엄마는 한 2주가 지나자 밤 9시만 되면 전화를 했다.

뭐 해?

나이트 가려고.

야!

그래서 집 나왔잖아. 뭐라고 할 자격 없는 거 아냐?


맨날 똑같은 대화였다.

그렇게 2주 정도 전화를 받고 엄마에게 통보했다.

한 번만 더 전화하면 전화번호를 바꿔버릴 거라고.

다음날은 전화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를 거르고 또 전화가 왔고, 나는 정말 번호를 바꾸고 3년간 가족들에게 번호를 알리지 않았다.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취업을 했다.

세 달 정도 동안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는 퇴사를 했다.

그리고는 또 그 돈으로 그렇게 놀았다.


놀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놀고 집에 들어오면 늘 공허함과 허무함, 우울함, 고통이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놀았다.

잠깐이라도 그 괴로움을 잊기 위해.


첫 극조증은 반년이 조금 넘게 지속되었다.

가을에 찾아온 울증이 나를 삼켰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정신과에 가려는 첫 시도를 했는데, 전화건 병원의 초진 예약은 두 달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모아놓은 돈은 떨어져 가고, 일을 할 힘은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부모님 집에 들어가긴 했지만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시간을 죽이다가 아침이면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늘 남동생이 받았고, 나는 동생에게 부모님 출근했어? 응, 아니 로만 대답해. 하고 이야기했다.

매일 부모님이 출근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님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함에 괴로웠다.


그리고 또 극조증이 왔다.

내 휴대폰번호를 가족들이 몰랐기 때문에 통제받지 않았다.

행동 양상은 처음 왔던 극조증때와 동일했다.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 집을 나서 친구들을 만나 클럽 오픈에 입장을 해서 마감을 찍고 나와 아침을 먹고 좀 더 놀다가 헤어졌다.

하루에 기껏해야 세 시간 정도 잤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놀기 위해 돈을 벌었지만 두 번째로 온 극조증에선 대출로 돈을 썼다는 점이다.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울증, 그때서야 나는 정신과를 내 발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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