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
그대는 좋고 나쁘고 추하고를 가리지 말고,
자기 생애의 모든 면을 되살피게 된다.
그대가 했던 말들, 그대가 주었던 선물들,
그대가 받아들였던 사물과 사람들,
그리고 그대가 삶을 살았던 방식.
통찰의 방에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이 펼쳐질 것이다.
리샤 윌리엄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
오늘 책을 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봄, 밖에서 학생과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부모를 잘 만나서 이런 것도 하는 거지" 라던 아주머니.
정작 난 그때 부모와 절연해 부모가 없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어찌 된 사람일까'
하고 뒤를 돌아봤으나 한눈에 봐도 한 군데 이상이 아픈 사람 같아서 그냥 두었다.
매번 지나가며 기웃거리던 그 사람은
어느 날에 내가 그림 그리는 걸 뒤에서 보고는 눈이 땡그래져서 지나갔다. 그 이후로는 조용해졌다.
벌써 그 일이 작년인가
"나도 고등학교 미술부였는데 미술 안 하길 참 잘했지!
돈도 못 벌고 취업도 안 되고."
내 면전에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보여서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실은 그는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거 같았다.
실직한 지 몇 년이나 됐을까,
실은 그가 일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대신 그의 부인이 일하는 것은 봐 왔다.
어찌어찌 말기 암으로 세상을 곧 떠난다는 사람에게
침묵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 최선이었다.
구태여 웃거나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쉴 새 없는 미움을 항시 받아온 터라
차츰 사람 냄새가 덜 나게 되었다.
종종 지구에서 누군가가 죽던 날.
외할머니 초상에도 울지 않았고,
이모부의 초상에도 울지 않았다.
친할아버지의 초상에도 그랬다.
사람들이 '쟤가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갑다...'라고 말이 나왔다는 건 후에 전해 들었다.
그건 아니고 울 게 아니라서
울지 않는 거였는데
입을 열면 열수록 사람들에 설명해야 하는 게 많아질 것이 눈에 보여서 나는 점점 과묵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쓰레기를 쉬이 길가에 버리듯
가볍게 툭툭 얹고 가는 말들과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고 그로 인한 결과들도 그러했다.
누군가를 만나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도
말과 행동을 하는 그 사람의 내면,
그로 인한 그 생의 결과가 모두 투명하게 보이고 느껴지기에 그저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먼 훗날 혹은 머지않은 미래에
통찰의 방에 앉아서
좋든 싫든 스스로 생각해 볼 일에 대하여,
누구나 공평하게 바로 앉아
온전하고 정확하게 계산해 볼 스스로들의 몫에 대해.
내가 웃으며 격려할 것도 과하게 응원할 것도 없었고
모난 돌을 던질 이유도 용서하지 못할 이유도
잘 갈아둔 흉기를 꺼내 푹 찌를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것은 내 것이 아니었고,
말은 침묵하는 경우보다 나을 때에 하게 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