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코코아를 허락하는 것으로도
물감, 붓, 종이 그리고 조용한 공간.
적막을 깨고 누군가 질문했다.
선생님 팔레트 꼭 씻어야 해요?
글쎄요?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될 거 같아요
- 근데 뭔가 불안해요. 꼭 내가 이 색을
다시 못 만들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장담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 그리고 언젠가 이 색을 쓸 일이 있지 않을까요?
-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 선생님, 크으... 사상가야 사상가
사상가, 철학자, 수행자, 스님, 산 등등
많은 것들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고
주로 그런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옆에 있으면 산에 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하며 편안해하던 학생도 기억이 났다.
추워진 겨울. 입김이 나오는 계절에 어울리게
오는 사람들에게 코코아나 홍차를 타드리곤 한다.
선생님! 저 코코아 타주실 수 있나요??
코코아를 마시고 싶다는 말에 따듯한 코코아를
찻잔에 담아내었다.
- 저는 사실... 코코아를 가루로 먹는 걸 더 좋아해요
- 분말만요?
- 네 ㅠ ㅠ
- (코코아 스틱을 가지러 가며) 그렇게 드세요
- 헉! 그래도 되나요?!?
- 안 될 건 뭐예요
- 항상... 사람들이 이렇게 먹으면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 이상하긴 하죠
- 헉... 너무해요
- :)
고작 코코아를 먹던 대로 먹으라는 건데
학생은 과하게 기뻐했다.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실내로 들인 장미에 꽃봉오리가 맺혀 다시 꽃이 피고 있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뻐지곤 한다.
겨울에 꽃이 피지 않아도 혹은 꽃이 피더라도
상관없이 내 마음이 기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잠깐 숨 돌릴 틈이 났을 때,
사방으로 시선을 돌리면 있는 초록의 식물들.
식물들을 조용히 구경하고 은밀하게 응원하곤 한다.
식물들에 감사하는 일은 보다 비밀스럽고 적극적이고
식물을 대할 땐 내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부드러운 힘으로 정중하게 대한다.
식물에 대한 경의는 살다 보니 다듬어진
모든 존재에 대한 존중에서 왔을 거 같다.
모든 존재의 생에 대한 찬사는
어딘가에 존재하던,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된 것일 거라
스스로 조용히 생각했다.
나의 식물박사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든 크고 건강하고 빛이 나게
키워내는 능력이 있었다.
'식물로 연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딸로 태어난 덕에 아버지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다. 다행히 귀찮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아빠, 식물은 겨울에는 자라지 않아?
나를 슥 보면서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는
무심하게 툭 말했다.
- 겨울은 살아만 있으면 그만인 계절인 거야.
사람이나 식물이나.
그 말을 하고 아버지는 어디론가 식물을 정리하러 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그 말에 대해 생각했지만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속뜻을 알게 된 그 말은,
매년 봄 여름 가을 동안 까맣게 잊고 살다가도
겨울이 되면 모든 것에 경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그런 단단한 문장이 되었다.
그 하나로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 존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 코코아를 분말로 먹어도 아무렇지 않은 건 저 문장의 덕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_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