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씩 내딛던 걸음들
노력한 거에 비해 더 큰 성과가 내게 찾아와 주길 바라는..
이런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 못한다.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뛰어 넘어보려 시작한 일...
그냥 난 남과 달라라는
우스운 사명감을 안고 시작한 일이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현실적 벽과 시간이 내게 몰고 오는 긴장감 속에
좌절과 고통에 몸서리치곤 하지만
무언가가 나를 이끄는 힘에 못 이겨 다시 일어나길 지금까지 얼마나 해왔는지 모르겠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내게도 꿈이 이루어졌음 좋겠다..하면서도
실력보다 운을 바라는 내 모습에 문득문득..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다니 하고..
그래도..운이 좋은 거도 일종의 실력 아닌가..하는..우스운 자기 합리화를 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8월의 고비를 넘는다...
처음에는 무지 높아보이던 정상도
한걸음 한걸음 계단의 연속을 헐떡이며 오르다보니
시작점보다 높아져 있는 나를 느끼곤
알 수 없는 자만 속에 나를 던져보지만
곧
다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시야에 들어오면
꼬깃꼬깃 자만의 쓰레기를
기억의 저편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다.
팽팽한 긴장감
알 수 없는 자신감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욕망
여름의 절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의문의 시간과 해답을 찾아헤매던
내 스물여덟이라는 청춘의 정점에서
신은 고민할 수 있다는 자유라는 행복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살아가야 하는 시간 중에 요행을 바라는 거...
이젠 하지말자 해보지만
역시나 안 그러겠다...
확언은 못한다.
다음엔 내게 어떤 요행이 일어나려나.
새로운 나날들이지만
항상 다른 곳이어도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꺼놓은 휴대전화만이 외로이 옆에서 벗을 해주고 있다.
오직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게 여기서 느끼는 만족감이며
나를 몰입시키는 모티브가 된다.
비스듬이 대각선 쪽에 앉은,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자꾸 눈에 거슬리지만
몇 시간째인지 모르게 자리를 지키며 오직 책과 씨름하는 모습에
나도 마음을 다 잡아본다.
새벽 두세 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의 연속.
피곤의 연속이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체력이 바닥났다고 생각했는데 책이 손에 잡히면 그냥 그대로 빠져든다.
그래도 지친 심신을 쉬고 싶을 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이 가져다준 밤 공기를 마시며 밖을 어슬렁거려 본다.
그러다가 가로등 불에 취해 살며시 머리를 벤치에 팔베게를 하고 뉘여 본다.
나무잎들 사이로 까만 하늘이 보인다.
하지만 빽빽한 나무잎들은 별빛 하나 달빛 한 점 허락하지 않은 채 점점이 하늘의 부분적 모습을 내게 살짝 비춰줄 뿐이다.
그래서 별을 볼 수 없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러곤 털고 일어나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면 이미 주인을 잃어버린 많은 자리들이 나를 맞아줄 뿐이다.
하얀 밤...
오늘은 그냥 아침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나 보다.
문득 의식의 흐름을 좇다 보니 밤의 까만색은 창가에 온데간데 없고
아침의 어스름만이 가득하다.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
다른 사람들은 다 등교하려고 올라오는데,
나만 길을 되짚어 내려가고 있다.
부시시한 머리와 빨갛게 충혈된 눈을 가진 채로 말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게 있다면
그건 아마
(그녀에 대한) 의식적인 회피일 것이다.
어둠 뿐인 창밖에 별빛이 내려
슬픔이 슬픔을 감싸주듯이
2002년 여름,
난 미 대학원 입학시험인 GRE 공부를 한참 하고 있었다.
낮 시간에는 석사과정 공부와 연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저녁 식사 이후 도서관에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고 아침에 약간 늦게 일어나 대학원 연구실로 향하는 나날들이었다.
GRE는 크게 언어영역(Verbal)과 수리영역 (Quantative)으로 나뉘는데
지난번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중화권에서 있었던 부정행위로 인해 2002년에 컴퓨터 시험이 종이 시험으로 대체되어 각 영역당 800점 만점에 총 1600점 만점의 시험이었다.
수학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한국 정규 교과 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학생이라면 수리영역에서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데, 문제는 언어영역이었다. 지금은 문제형식이 많이 바뀌긴 했는데, 그당시 GRE 언어영역의 문제라는 것이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리고 그 이후로도 평생 거의 보지 못할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문제를 낸다. 예를 들면,
같은 관계 찾기
CHRONICLE:JOURNEY::
A. assume:debt
B. enumerate:demands
C. banish:doubts
D. juxtapose:positions
E. clarify:intentions
반의어 찾기
INSULAR :: (A) partisan(B) erudite(C) cosmopolitan(D) imperturbable
매 문제당 꼭 모르는 단어가 적어도 한두 개씩은 있었기 때문에 GRE 시험 공부의 목표는 오직 모르는 단어 암기였다. 그래서 매일매일 생소한 단어를 수십 개에서 어쩔 때는 수백 개까지 거의 서너 달 동안 외우고 또 외웠다. 어려서부터 영어로된 책을 많이 접하고 읽어온 원어민들에게는 문제에서 요구하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순전히 단어의 뜻만 기계적으로 외워야했던 나같은 비영어권 수험생들에게는 그야말로 암기 테스트같은 시험이었다. 이때 뜻도 생소한 6~7천개의 단어를 단기간에 외웠던 것 같은데, 이렇게 외웠던 모든 단어는 휘발성이 매우 강해서 그때 외웠던 단어들을 지금 보면 분명히 봤던 단어라는 것은 기억해도, 전혀 그 뜻을 기억하지 못한다.
젊음 한가운데에서 집, 연구실, 도서관을 쳇바퀴 돌며 이렇게 재미없는 시험 공부를 하고 있으니,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시험 볼 때 내가 아는 것만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 요행을 바라는 것이었다.
힘겨웠지만 그래도 이런 지루한 싸움의 보상이라면 한걸음 한걸음씩 내딛던 그 작은 걸음들과 노력들이 결국은 무엇이 되었든 어떤 성취가 되어 돌아온다는 너무나 자명한 진리를 경험했다는 것이 아닐까?
난 지금도 누가
'너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라고 물어보면 전혀 망설이지 않고
'아니'
라고 말한다.
그만큼 내 깜냥 내에서 난 치열했고, 최선을 다했고, 정말 죽을 만큼 힘겨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그 젊은 날들에 후회는 없다.
(계속)
*이 글을 읽기 전에 첫번째 '프롤로그'를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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