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11] 편지

너무 소중한 연인에게

by 짜근별

2003.05.02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메일과 편지의 차이점이 뭔지 아니?'


답은 '제목'의 유무였다.


처음 이메일을 접했을 때 편지에 제목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고,

지금도 이메일을 작성할 때면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제목을 정하는 데 쏟아 붓는다.

어처구니없는 정신적 낭비가 아닌가 싶다.


공식 서한 같은 경우 때론 도움이 되지만

그 제목이 우리에게 안겨 주는 거라고는 고작 그 내용에 대한 요약일 뿐이니

친근감을 표현해야 하는 편지일 경우 그 감흥을 에누리해 버린다.

그렇다고 '제목 없음'이라는 것으로 남겨 놓기에는 뭔지 모를 아쉬움이 머리 한켠을 압박해 온다.


그 편리함과 신속함 때문에 우린 어느새 E-세상에 살고 있어서,

한자 한자 정성 들여 적어 내려가는 편지의 존재 가치를 잃어 가고 있다.

활자화되지 않은 자필 편지를 받음에 기뻐하는 것은 보낸이가 그것을 적어내려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편지가 주는 또 하나의 이점은 글쓴이가 받는이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퇴고의 과정을 거쳐서 정갈하고 깔끔하게 마름질된 내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을 벗삼고자 하는 것은 대자연의 푸근함과 넉넉함 속에서 여유를 찾고자 함이기에

신속함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이메일이 현대인의 삶에 필수적일지라 하더라도

자연스러움의 대변자인 편지가 주는 포근함은 결코 따라가지 못하리라.


그래서 난 편지를 쓰기를 좋아한다.

특히나 그것을 받는 누군가의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지어줄 수 있다면,

자연과 함께 사는 자연인으로서 내게는 더없는 행복일 것이다.

그러한 쓰기에 꼭 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기에 이는 자비의 담금질이며,

쓰는 노력과 기다림에 힘듦을 느끼지 않기에 인내의 교육장이고,

남에게 기쁨을 준다면 이는 보시(布施)의 표본이다.


편지의 단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억 길이가 바라는 바에 미치지 못함이니

편지속에 담았던 순간순간 느꼈던 진실된 마음과 수많은 다짐들도

미련한 인간의 망각 속에서 잊혀져 버림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받은 이의 베품이 없이는 다시 그 마음을 엿볼 길이 없기에

난 오늘도 순간순간 적어나가는 그 느낌과 생각들이

오래오래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도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며....


이천삼년 오월의 둘째날

- 친구라하기엔 너무 소중한 연인에게



[아내가 여친이던 시절 보냈던 편지 中에서]


살면서 인상 깊게 봤던 강연 중에 하나가 시골 의사 박경철의 '다음의 W를 찾아서'이다.

자신의 투자 철학과 성공 스토리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잉여인간'이라는 개념을 배웠는데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이 강연에서 한참 자신의 경험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과정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이메일이 도입되었을 때 자신이 받았던 놀라움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0년대 초반은 이메일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과도기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통신 수단과 전통적인 편지와의 혼돈과 충돌이 있던 시기가 있었다. 이메일이라는 의미 자체가 '전자편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이메일이 편지를 완전히 대체하는 수단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월은 이메일에게는 개인적인 용도보다는 공적인 용도로 활용되는 길을 열어주었고, 오고가기에 시간이 걸려는 편지의 느림을 참지못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용도의 즉자적 통신 방법으로 카톡같은 메신저를 택해서, 손으로 쓰는 오고가는 편지는 이제 잊혀진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화려한 꽃무늬 장식으로 문방구를 채워 주웠던 편지지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마음의 특별함을 전해야 하는 경우에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초창기 이메일 서비스에는 '수신확인'이라는 기능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 있었다. 지금처럼 연인이나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고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수신확인이라는 기능은 아날로그 편지가 줄 수 없는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선사했다. 특히나 이성에게 보내는 이메일일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레임과 장점에도 초창기의 이런 혼돈으로 인해 편지에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나는 이메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니 결국 기록으로 남은 것은 '보낸메일함'과 '받은메일함'에 있는 내 기억의 자취들 뿐이라는 아이러니. 그런 이메일이 고마워지는 하루다.



(계속)


*이 글을 읽기 전에 첫번째 '프롤로그'를 읽으세요.


[이별後愛] -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하지만 처절하게 가슴시렸던 첫사랑과의 만남과 이별

[응답하라2002] - 간절했던 꿈을 향한 유학도전기와 X세대 친구들의 20대시절 고민과 만나는 추억 여행

[삶, 사람, 사랑] 유학, 이민 생활 동안 떠오르던 단상과 고민들 그 일상 나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