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교, 과외 금지 주체의 비밀과외
대개의 80학번이 그랬듯이 나의 대학 1학년 시절은 데모와 휴교로 얼룩져 있다.
10.26으로 촉발된 민주화운동은 대학가에서 특히 격렬했는데, 대학 안팎은 늘 최루탄 가스가 코를 찔렀고,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어떤 과목은 첫 시간을 교수가 '책 소개'만 하고 끝낸 뒤, 다음 시간은 데모하느라 결석, 그다음 시간은 교수가 휴강, 이런 식이었는데, 5월 17일 학교에 갔더니 휴교령이 내려져 있었다.
학교 정문은 장갑차가 막고 있었고, 소총을 든 군인들이 출입을 차단했다. 그중 한 군인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학교에 들어갈 수 없나요?" 물었더니 대답도 없이 다짜고짜 군홧발로 걷어찼다.
그날은 비극적인 5.18 학살이 일어나기 전날이었고, 휴교령이 전국적인 저항을 차단하기 위한 신군부의 치밀한 사전 준비였음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휴교는 8월 28일까지 104일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1학년 1학기는 한 번도 강의를 듣지 못한 과목도 있었다. 시험은 리포트로 대체한다고 했지만, 데모하느라 리포트조차 안 낸 과목도 F가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C와 D가 대부분이었기는 했지만...
학교를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당시 활발했던 '학회'(언더 서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일본어로 된 자본주의 비판 서적을 공부하느라 사흘간 합숙하며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다.(회화는 전혀 모르는 책 읽기용 일본어)
휴교령이 끝난 이후에도 학교는 여전히 혼란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동기생이 문득 사라졌는데,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이 소포로 집에 배달되기도 했다. 발신지는 신병훈련소. 이른바 '강제징집'을 당한 것이다. 당시에는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에 잡히면 '군대를 갈지, 감옥에 갈지 결정하라'는 협박에 의해 유치장에서 신병훈련소로 직행하는 강제징집이 흔했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강남 고속터미널 인근에서 학생 서너 명이 버스에 뛰어들었다. 근처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경찰이 진압작전을 펼치자 버스로 피신한 것이다. 사당동 쪽으로 가던 버스는 갑자기 노선을 벗어나 방배동에 있는 관악경찰서로 들어갔다.(관악경찰서는 1991년에 봉천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방배경찰서가 신설됐다.) 버스는 경찰서 앞마당에 정차했고, 잠시 후 경찰 몇 명이 올라와 시위학생들을 체포해 간 뒤 다시 원래 노선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시위학생을 쫓던 사복경찰이 학생들을 뒤따라 몰래 버스에 탔는데 혼자서 여러 명을 체포하기 어렵자 버스 기사에게 은밀히 접근해 신분증을 보이고는 버스 노선 바로 옆에 있는 관악경찰서로 버스를 몰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사복경찰이 학교 내부는 물론 사회 곳곳에 숱하게 깔려 감시와 첩보수집을 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7월 30일, 이른바 ‘7.30 교육개혁 조치’를 내놓으며 과외 전면 금지를 선언했다. 과외를 받은 학생뿐 아니라 과외를 시킨 교사나 학부모도 처벌했다. 그해 11월 과외를 받은 중·고생 96명을 적발해 그중 47명은 무기정학을 시키고, 학부모 24명은 직장에서 해고, 과외 교사들은 재판에 넘겼다. 1987년 말까지 과외로 적발된 인원은 약 2500명이었는데 이중 10%가량이 형사입건됐고, 직장에서 쫓겨난 공직자만 139명이나 됐다.
그러나 그런 단속의 대상이 되는 건 평민들 얘기고, 권력층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내 동기생은 그때 고액의 비밀 과외교사를 했는데, 수강생은 장군의 자녀였다. 그 학부모는 나중에 국방장관까지 한 사람인데 전두환 정권에서 장군 출신에 국방장관까지 했을 정도니 권력의 핵심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흔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는데, 그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자기네들끼리만 뛰는 운동장'을 만든 셈이다.
"어때? 그 집 잘 살디?"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겠는데, 집에 선물방이 있더라"
"선물방?"
"응. 선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둘 데가 없어서 방을 하나 비우고 선물만 쌓아두는데 천정까지 쌓여있다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