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D: Report on Demand
1993년 나는 보도국 국제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12월 4일 토요일 저녁, 맡은 일을 끝마치고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입 좀 빌려주라'는 부장의 지시가 있었다. 입을 빌려준다는 것은 다른 기자가 쓴 리포트 기사를 대신 읽어준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리포트를 제작했는데 같은 뉴스(예를 들어 9시 뉴스)에서 다른 리포트를 하나 더 해야 할 경우, 써 놓은 기사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읽도록 하는 것이다.
"원고 데스킹까지 봤고, 영상 자료도 준비됐으니 그냥 읽어주기만 하면 돼. 여기 관련 자료도 다 있어"
"제가 기사 쓸 것도 아니니까 자료 볼 일도 없어요"
"그래도 자료는 책상에 놓고 갈게"
그런데 써 준 원고를 읽어 보니 길이가 2분이 넘었다. 할당된 시간은 1분 30초뿐이라 30초 이상을 들어내야 했다.
"부장, 30초나 초과하는데 어쩔까요?"
"뒤에서 한 문장 들어내"
방송용 기사는 보통 맨 앞에 중요한 내용을 두는 두괄식 구조가 많다. 기술적으로는 테이프로 편집된 리포트의 길이를 조절할 때 앞부분을 자르면 전체를 다시 편집해야 하지만 맨 뒷부분을 자르면 재편집이 훨씬 간단하다. 그래서 통상적인 방식대로 맨 끝 문장을 들어냈는데 여전히 15초 이상 초과했다. 할 수 없이 내용을 살펴보고 뺄만한 부분을 찾았다.
리포트의 제목은 '각국 정보기관의 수사권 보유 상황'이었는데, 쭉 읽다 보니 '미국의 FBI는 수사권을 갖고 있다'는 문장이 있었다.
"엥? FBI는 연방수사국인데 수사기관에 수사권이 없을 수 있나? 우리나라 경찰청 같은 건데... 정보기관이라기보다는 수사기관인데 왜 이런 게 끼어있지? 부장! FBI는 다른 거랑 좀 안 맞는데 뺄까요?"
"알아서 해"
그래서 내레이션 길이를 1분 30초에 맞춰 영상편집부로 넘겨주고는 곧바로 퇴근했다.
집에서 느긋하게 뉴스를 보고 있는데 "여야가 안기부 수사권 폐지문제로 맞서 있다"는 리포트가 나왔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던 부분인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더니 바로 뒤이어 내가 '입을 빌려준' 리포트가 나왔다.
"[앵커] 방금 보도에서 지적된 대로 안기부법 개정안이 우리 국회에서는 큰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마는 지금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냉전 종식 이후 그 성격과 활동영역을 크게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어? 이게 그렇게 정치와 연결된 리포트였어?! 깜짝 놀란 나는 급히 내가 고친 원고와 원래의 원고를 비교해 봤다. 선배가 원래 써 준 원고에는 외국 정보기관 중에 수사권 있는 사례와 없는 사례들이 섞여 있었는데 들어낸 맨 끝 부분(아마 벨기에 정보기관이었던가 그랬다)과 '정보기관도 아닌데' 하면서 빼낸 FBI가 수사권이 있는 사례의 전부였다. 즉 원래는 '외국에는 수사권 있는 정보기관도 있다'는 주제의 리포트였는데 길이 맞춘다고 들어낸 부분이 하필 그 부분이어서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은 수사권 따위 없다'는 리포트가 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했더니 국제부 분위기가 썰렁했다. 책상 위에 놓고 갔던 보도용 참고자료도 사라졌다.
"oo 씨, 내 책상에 있던 자료 못 봤어?"
"아침 일찍 보도국장님이 와서 가져가셨는데요."
사정을 알아보니 다음 주 초로 예정된 안기부법 개정안 의결을 앞두고 보도국장이 어디선가 '참고자료'들을 받아와서는 그 선배에게 "이걸 바탕으로 리포트 하나 해라"라고 했던 '주문형 리포트'였는데 내막을 모르는 내가 칼질을 하는 바람에 주문과 정반대의 물건이 나간 것이었다.
국제부장은 뭔가 한 소리 들었는지 우거지상이었다.
"큰일이네... 북한 영상 단독 입수한 게 있어서 특종뉴스 내려고 했는데... 송종문 씨 리포트 때문에... 안기부가 협조해 줄래나...?"
아마 당시에는 북한 관련 영상을 방송에 내려면 안기부와 협의절차를 거쳤던 모양이다.
원래 주문자가 누구였는지 짐작은 가는데, 그런 심각한 주문형 리포트(ROD?: Report on Demand)였으면 부장이 알아서 집중관리하든지... 왜 내가 칼질할 때는 맘대로 하랬는지...
당시 안기부의 고무/찬양, 불고지죄 수사권 폐지에 대한 YS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야당 대표 시절의 YS는 해당 수사권 폐지 입법안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집권의 기반인 민자당을 만들 때 5공 세력인 민정당과 합쳤으니 입장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대통령의 뜻이었을 수도, 반대로 대통령 뜻을 몰래 어기는 '딴짓'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이 보기에는 "KBS가 정보기관에는 수사권이 필요 없다고 하니 그게 대통령의 뜻인가 보다"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다음 주 초(12월 7일) 안기부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다.
그 참조자료를 줬다가 서둘러 회수했던 보도국장이 다음 해 보도본부장으로 승진했고, 폐지됐던 안기부의 대공 수사권이 꼭 3년 뒤인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의 날치기 입법으로 되살아난 것을 보면, 보도 청탁자가 누구였든 길게 보면 YS와 따로 논 건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