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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 이야기(2)

은행을 뒷문으로 드나들던 시절

by 송종문

A사에서 일반 자금업무를 하던 어느 날, 직속 상사인 경리과장이 따로 불렀다.

통장을 한 다발 내놓고는 "회사에서 관리하는 자금인데, 앞으로는 자네한테 일을 맡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뭔가 하면서 살펴보니 각기 다른 개인 이름으로 된 통장들에 몇 억씩의 돈이 들어 있었다.

당시는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전이라 가차명 계좌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고 어리둥절했으나 시키는 대로 일을 해가면서 그게 '비자금'이란 걸 알게 됐다. 그때는 '비자금'이란 용어자체가 없었고, 그 돈에 대한 건 서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라 뭐라 지칭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비자금 관리 업무는 대개 일반 자금 업무를 일찍 마치고 은행 마감 시간 무렵 지점으로 가는데서부터 시작됐다. 드나드는 방법부터가 특이했는데, 마감 시간 이후에 가기 때문에 정문은 닫혀 있고 뒷문으로 해서 지점장실로 바로 들어갔다. 업무 자체는 단순해서 이쪽 계좌 돈 일부를 저쪽 계좌로 옮기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일종의 돈세탁인 셈이다. 문제는 수표나 이체로 옮기면 흔적이 남기 때문에 항상 현금 인출, 현금 입금이어야 한다는 것. 한 은행에서 돈을 빼서 같은 은행 계좌로 옮기면 해당 지점 현금에 변화가 없으니 서류 작업만으로 가능할 텐데, 그렇게만 하면 특정 금액의 입금과 출금이 눈에 띌 수 있어서 가능하면 실제 현금을 인출해 다른 은행으로 옮겼다. 금액이 적으면 인출한 돈을 직접 다른 은행으로 가져가서 입금하기도 하지만 금액이 크거나 건수가 많으면 아예 돈 받을 은행 지점의 담당자를 그 자리로 불러 입금 처리를 하기도 했다. A은행의 지점장실에 A은행 직원과 B은행 직원이 마주 앉아서 지폐 계수기로 돈을 세어 주고받는 것이다. 아무래도 비자금의 세탁은 은행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으면 아주 어려운 작업이다.

몇 달간 그렇게 열심히 돈을 세탁하고 있는데 그 통장들에서 40억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한차례 세탁을 더 한 뒤에 9억 9천만 원짜리 수표 4장을 만들어 전달했다. 금액이 9억 9천이었던 이유는 그 당시 수표발행기가 콤마를 빼고 9자리만 인쇄할 수 있어서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때가 1987년 겨울 무렵이었는데 당시에는 "왜 이때 거액을 빼가는 거지?" 하는 의문을 전혀 갖지 않았다가 뒤늦게야 1987.12.16에 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선거자금이나 당선 축하금으로 쓰인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비자금의 조성과 세탁, 사용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기업의 비자금 관련 업무는 평생직장과 출세가 보장될 자리였지만 나로서는 좀 꺼림칙한 일이었다. 다른 분야로 이직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과장에게 회사를 관두려 한다고 말을 했더니 화들짝 놀랐다. 회사의 비밀을 아는 직원이 나간다니 당황했을 것이다. 열심히 만류하다가 끝내 마음을 돌릴 수 없겠다고 판단됐는지, "나가는 건 좋은데 6개월만 회사 다른 부서에서 일하다가 나가 달라"라고 했다. 아마 비자금 관련 계좌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 때문에 고생할 걸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관심이 있던 분야도 있어서 6개월을 더 일하다가 나왔다.


[관련 역사] 대한민국에서 '비자금'이라는 용어는 1987년 4월 범양상선의 불법 외화유출사건에 대한 국세청의 발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내가 비자금 업무를 맡을 무렵이었지만 널리 쓰일 때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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