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이범석 장군과 족청
광복 직후의 우리나라는 혼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총독부를 정점으로 한 행정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사법,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가 진통을 겪었다. 특히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뒤섞인 정치판은 아수라장이었다.
1945년 10월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고, 잇따라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이들이 귀국할 때마다 수만 인파가 몰리는 열렬한 환영행사가 벌어졌고, 이런 열기는 곧바로 각자의 정치세력 구축으로 이어졌다. 당시에 아버지는 아직 철도고등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치판에 관심을 기울일 형편이 못됐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46년 6월. 철기 이범석 장군이 귀국했다.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이범석은 곧바로 청년단체 조직에 착수해 단 넉 달만인 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 통칭 '족청'을 창단했다. 족청은 한때 단원 수 110만 명에 이르렀던 최대의 우익 청년단체였다.
족청은 우익 청년 단체 중에 가장 교육과 훈련에 노력을 기울인 단체였다. 경기도 수원에 간부훈련소를 두고 1~10기까지 간부 수료생 3천475명을 배출했다고 하니, 단 2년 만에 사라진 단체가 교육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족청이 해산된 뒤에도 수십 년간 정치인의 위상이나 성향을 설명할 때면 "그 사람 족청계야" 하는 말을 하곤 했을 정도로 정치 계몽 조직, 정치인 양성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족청의 지도부는 대부분 광복군 시절부터 이범석 장군과 함께했던 이들이었지만 비서진은 공모로 선발했다. 유명한 독립군 장군이자 미래의 정치 지도자로 기대를 한 몸에 모으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응모해 시험을 치렀다. 단 3명을 뽑는 비서 자리에 아버지는 합격했다.
"시험이라고 해 봤자 별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뽑혀서 기분은 좋았지. 근데 나중에 보니까 나 말고 다른 두 사람은 내정자였더라고"
이범석 장군이 굳이 내정자를 밀어 넣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선발시험을 진행하던 누군가가 자기 사람을 밀어 넣었다고 여겨졌지만, 한 자리라도 진짜 공모 선발자가 있었던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요즘 수많은 공공기관의 장이나 이사, 감사 선발은 모양만 공모고 실제로는 99.9% 내정자로 채우는 시대가 됐으니 광복 직후의 혼란기만도 못한 셈 아닌가.
어렵사리 비서로 뽑혔지만 아버지는 족청 활동이나 이범석 장군에 대해서는 거의 말씀이 없었다. 그저 "이승만이한테 이용이나 당했지 뭐.." 하는 정도.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조선민족청년단을 대한청년단에 흡수시켜야겠다며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이범석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듯이 시늉하면서도 배후공작을 벌여 부통령 선거에서 이범석을 떨어뜨렸다.
저 사진이 찍힐 무렵인 49년 3월에는 족청은 이미 대한청년단에 흡수됐고, 그 이후 대개의 청년단체들은 정치적 공작과 난투극의 전위대 역할로 전락했다.
아버지는 그전에 족청 활동을 흐지부지 끝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너무 가난해서 먹고살기만도 바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남의 앞에 나서서 정치를 할 성격도 아니었고..
그리고 얼마 안 가 전쟁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