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잃은 병사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소위로 참전했다. 철도고등학교(당시 이름은 중앙교통종사원 양성소) 전신과(電信科)를 나온 경력 때문인지 통신소대장으로 복무했다.
갑종 간부후보생 과정같은 급조된 단기 장교 양성과정에서 몇 달의 교육만 시킨 소위들을 전장에 내보내다 보니 전사자가 속출했다.
"총알이 '쏘위, 쏘위'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고들 했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총알이 소위를 찾아다니며 죽인다고"
한국군은 당시로선 첨단 장비였던 무선통신기가 모자라 야전 통신의 상당 부분을 유선전화에 의존했다. '삐삐선'이라고 부르던 통신선을 깔고 자석식 전화를 돌려 통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삐삐선이 포격 등으로 계속 끊어지는 데다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선을 새로 깔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통신 소대는 수시로 총탄이 날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삐삐선을 감은 릴을 들고 뛰어다니며 선을 깔고 끊어진 곳을 점검하러 다녀야 했다.
전쟁 말기인 1953년 어느 날 아침, 통신선을 점검하던 소대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언덕 너머에서 작전을 펼치던 중 포탄인지 지뢰인지가 터져 병사 하나가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급히 몇몇 소대원과 함께 들것을 가지고 달려갔다. 그 병사는 폭발에 휩쓸려 한쪽 다리가 무릎 어름에서 날아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급히 지혈을 한 뒤 들것에 싣고 본부 쪽으로 뛰었다.
본부에 다 와갈 무렵 부상병이 희미하나마 정신을 차리고는 가냘픈 목소리로 소대장을 찾았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그래, 나 여기 있다."
"다리... 제 다리요..."
"다리?"
"제 다리 가져오셨지요?, 제 다리 붙여야 하는데... 붙여야 하는데... 갖고 왔지요?"
아마도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의 다리가 날아간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출혈과 쇼크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불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다리 걱정을 하는구나. 그러나 과다출혈에다 의료진과 의료 시설이 빈약한 최전선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 다리를 붙여줄 의사나 시설이 있는 곳까지 제때 후송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한데... 날아간 다리는 어디 있는지도 못 봤는데...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차마 "네 다리 못 붙인다. 버리고 왔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걱정 마라. 갖고 왔다. 붙일 거야, 붙일 수 있게 니 다리 가져왔다"
그 말을 듣자 병사는 안심한 듯 스르르 눈을 감으며 다시 의식을 잃었고, 본부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후송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이후 전사 소식을 듣지는 않았으니 그 병사는 아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으로 살았으리라. 50년대, 60년대의 그 간난(艱難)의 세월을 어찌 견뎌냈을지...
[관련 역사 1] 한국 전쟁이 끝난 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상이군인과 전쟁미망인이 생겼다.(사망 및 실종자 17만 737명, 부상자 45만 742명,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당시의 의료보장구 제품은 형편없는 수준이어서 손이 없는 장애인에게는 쇠갈고리(만화영화 피터팬에서 후크 선장이 팔에 끼고 있는 것), 다리가 없는 장애인에게는 막대기 수준의 의족('모비딕'의 '에이햅 선장' 같은)이 고작이었다. 보는 사람에게 뭔가 두려움을 사기 쉬운 모양새였던 것.
게다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상이군인에 대한 나라의 생계지원도 빈약하다 보니 술에 취해 분노를 쏟아내는 상이군인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래서 6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상이군인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하다. 맨날 '호국영령'이 어쩌고 하는데, 막상 '호국생령'에 대한 처우나 사회적 시각은 엉망이었다.
60년대 중반에는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거리에 의족과 의수를 파는 가게가 많이 생겨났는데, 당시에 유리창 안에 진열된 고무로 된 손과 발이 요즘보다 훨씬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을 회상해 보면 아마도 갈고리 같은 걸 달고 지내던 많은 상이군인들이 뒤늦게나마 좀 더 나은 의족과 의수로 바꿀 수 있게 되었던 듯하다.
전쟁미망인들도 정말 힘든 삶을 살았다. 내가 금융담당 기자를 할 때 보험역사에 해박한 전문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보험 초기의 성장에는 전쟁미망인의 역할이 컸습니다. 당장 먹고살기도 어렵던 시절에 보험금도 제대로 안 주는 보험을 들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전쟁미망인들이 보험 모집인으로 다니면서 제발 이거라도 들어주시면 제가 애들과 함께 굶지 않겠다고 하소연을 하니 인정 상 가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물론 몇 달 지나지 않아 해약을 하니 그 보험료는 몽땅 보험회사가 먹었지요."
[관련 역사 2] 1949년 9월 개교한 육군 보병학교가 50년 1950년 1월에 6개월짜리 초급장교 양성 과정을 개설했는데 이것이 갑종간부 후보생과정이다.(고졸 이상은 '갑종'으로 소위로 임관, 중졸 이하는 '을종'으로 일등 중사로 임관)
1월엔 1기생 387명, 4월에는 2기생 150명이 입교했으나 6월에 한국 전쟁이 터지자 휴교하고, 교육 중이던 간부 후보생들은 그대로 전투에 나가 대다수가 전사한다.
육군보병학교는 50년 8월 15일 부산으로 옮겨 얼마 살아남지 못한 갑종간부 후보생 1~2기를 다시 받아들여 1기는 7월 15일에 임관시키고, 2기는 9월 10일에 임관시켰다.
6.25에 참전한 장교의 30% 이상이 갑종장교였으며 한국 전쟁 기간 중 임관한 갑종 1~49기는 총 10,550명으로 이 중에서 2,000여 명이 전사하고 54명이 장성이 됐다.
베트남 전쟁 때 참전한 육군 장교 22,000여 명 중에도 14,700여 명이 갑종 장교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