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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나무 Aug 29. 2020

하루키 씨가 알려준 그럼에도, 자유

글과 연기의 상관관계

다른 잡다한 일을 하다 문득 글을 쓰는 게 유독 즐거운 이유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내가 가장 오래 해온 일인 연기와 ‘비교’ 해서 즐거운 이유를 생각해보게 됐다.


글을 쓸 때는 아무래도 자의식이 훨씬 덜하다. 왜냐면 누군가의 코멘트를 원하지도 않고 또 내가 묻지 않았는데 적극적으로 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어서 내 글에 대한 타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글은 무언가를 적는 동시에 활자화돼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연기의 가장 큰 속성은 연기하고 있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가 했지만 스스로만 볼 수 없는 역설. 그러다 보니 늘 내 연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했고, 다년간 연기를 배우면서 고쳐야 할 코멘트들을 뺵빽이 적은 노트가 집에 쌓여있을 정도다. 내가 연기해 온 과정은 코멘트를 하나하나 지우는 퀘스트였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돈을 내고 코멘트를 듣기 위함이니 될 수 있는 한 많이 들으려 했고 심지어 쫓아다니며 들었고- 노트에 적힌 퀘스트들을 얼른 지우고 싶어서 빨리 내 연기가 그 피드백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떡해야 하는지에 몰두했다.


돈을 내고 코멘트를 듣는 과정을 끝내자 돈을 받고 연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이제는 돈을 받고 코멘트를 들으니 내 연기가 코멘트하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돈 값 못하는 연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중압감이 어느 순간 연기를 하는 재미를 넘어섰던 게 아닌가 싶다. 밥 값은 하는 어른이고 싶었으니까.


그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처음 연기를 하고 싶었던 그 동력과 재미를 팽개치고 부자유하고 재미없지만 견뎌야 하는 것들에만 갇혀 있음을 느꼈는데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를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해 줬다.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최저한의 자유를 팽개치고 온종일 나에 대한 코멘트를 스스로 작성하고 스스로 없애는 일을 공장 돌아가듯이 하지 않으면 밥값 못하는 인간이 될 것 같은 공포에- 진짜 즐거운 기분으로 무언가를 준비하는 행복감을 서서히 까먹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업’으로써 글을 대하고,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글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피로도도 없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직업으로써의 작가를 꿈꾸고, 돈을 받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연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코멘트를 듣고, 스스로 더 엄격하게 검열하고 종국에는 글을 쓰는 재미 따위는 팽개쳐버리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하루키 씨의 자유와 즐거움에 대한 추구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며,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 …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구절은 몇 번을 읽어도 두근두근 하고 내 안에 침전돼 있던 뭔가를 다시 끌어올린다.


그러니까 꼭 ‘고통’이 수반되는 작업만이 나를 창작자로, 예술하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그 고통이 연기하는 이유를 앗아갈 수 있다고- 즐거움을 쫓았던 초창기의 스스로에게 다시 회귀하라고 말이다. 맞다- 사실 나는 ‘고통’ 그 자체가 배우가 되는 가장 강력한 재료이자 연기를 열심히 한 자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정이 충분히 고통스럽고 스스로에게 폭력적이었음에도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는 상실감에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연기를 하면서 어떤 인물을 알아가고, 공감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던 순간과 그렇지 않았던 순간들이 있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보다 중요한 것들이 점점 쌓여갔다. 오케이 사인, 긴장하면 안 된다는 압박, 잘 해내지 않으면 다음 기회가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 … 당연한 수순으로 스스로를 전혀 믿지 못하는 지경까지 왔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 그 어떤 일이라도 재미있을 리 없을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에 처음부터 그다지 깊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무욕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할까


역으로 그렇다면 나는 연기로 어떤 욕심을 채우고 싶었길래 그토록 재미없고 무겁고 어려운 마음이 들게 됐을까 직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과물들이 내 마음에 들었다면 재미없던 피드백에 깔려 압사할 것 같던 어쨌든 나는 그 방식들을 고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정들과 결과물에서 스스로의 만족을 얻기가 힘들었다. 이토록 비효율적인 게 어디 있을까- 과정도 재미있지가 않고 결과물도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나는 처음 꿈을 꿨던 생생한 감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스스로 재미있어야만, 자유해야만, 그 에너지가 보는 사람에게도 전달될 거라는 믿음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내가 재미를 추구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스스로를 조금 대변해주자면- 잘하지 않으면 늘 열외 될 것 같은, 모두가 날 비웃을 것 같은 곳에 몰려 봤기 때문에 쌓인 공포일 것이다. 그 두려움 가운데 ‘재미’를 추구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사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두려운 것이 나를 둘러싸는 기분이라 해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것들을 잊지 않아야 할 최저한의 자유- 그리하여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 그래야 재밌게 연기할 수 있으니까. 글을 쓸 때 자의식을 덜 느끼고 스스로의 마음을 더 알게 되고 위로를 받는 것처럼 연기할 때도 그럴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믿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던 상관없었던,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유- 다시 기억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하루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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