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내가 적을 글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주제, 내 일상에 복잡한 문제를 안겨주고 또 가장 큰 행복을 안겨주는 숙적이자 나의 전부. 관계에 대한 글을 적기 전부터 나는 내가 너무 이 주제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내 글을 읽는 이들이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 보는 건 아닌지 소심해진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관계에 관한 글을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관계는 내 삶의 가장 큰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관계'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라는 것이 절망스럽다.
내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증거를 자꾸 확인하게 되는 두려움이라 그렇다.
몇 해 전, 친구 결혼식의 사회를 봐준 적이 있다. 친구가 외국 분과 결혼을 하게 돼서 남자 사회자는 영어로, 나는 한국어로 보는 사회 자리였다. 신부가 전학 가기 전 3개월밖에 다니지 않은 학교의 동창이라 그곳에 내가 아는 친구가 많을 거 같지도 않았고, 마주친다 해도 서로가 기억이 가물한 그 정도 일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와서 인사를 거는 A가 있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상세하진 않지만, 중학생 때 같은 반이었고, 활달하고, 제법 공부를 잘했었다는 기억이 있었다. 나와는 친하지도 않았고, 안 좋은 기억도 없는 A인데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약간 굳었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웃으며 농담까지 하며 사회를 봤고, 그걸 A가 다 봤다는 게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분명 그 친구와 안 좋은 기억도 없는데 말이다.
집에 갈 때가 되어 신랑 신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는 A에게 인사를 하고 나올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인사를 하고 나오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A에게 중학생 때의 나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심하고, 무례한 행동에도 그저 웃어버리는 착한 중학생 때의 내가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사람에게 쉽게 졸지 않는 그런 나로 보이고 싶었다. A는 나의 인사에 큰 반응 없이 잘 가라고만 했다.
결혼식장에서 나오고 난 뒤에도 그 일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왜 의기소침해졌는지, 왜 A를 그렇게 의식하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깨달았다. 나는 그 친구 앞에서 15살의 나로 돌아갔구나. 나는 그때의 나를 관계 안에서 주눅 들고, 의기소침했던 사람으로 기억하는구나. 그래서 A에게 그때의 나의 이미지를 갱신하고 싶었던 것일까?
A를 만난 일뿐만 아니라 관계 안에서 나는 내가 이미 지나간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부여잡고 있고, 그 상처를 토대로 지금의 관계들도 맺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미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은 지나갔고 나 또한 그때의 나와는 달라졌는데,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은 성장하지 못한 채 아직도 교복을 입고, 실패했던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관계는 전혀 새로운 관계가 되지 못하고 예전의 기억이 토대가 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관계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빨리 호의를 얻어 친구를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지. 그래서 서툴게 다가가거나 무리에서 겉돌아도 괜찮은 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됐는데, 3월에 적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괴로움이 있었고, 더 이상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격적인 생존의 문제로 인식됐다.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나는 무리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습득했다. 잘 웃고, 착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고. 그때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소속감을 얻는 게 기뻤지만, 그게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이 없이 이뤄졌을 때-가령 나의 기분, 나의 상태-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잘 웃고 착하고 잘 들어주며 사람들의 호의를 먹고사는 그녀를 '빌런'이라고 명명한다.
빌런, 그녀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녀는 잘 웃는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크게 웃기 일 수 여서,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는 그녀의 웃음이 타인의 경계심을 푼다는 걸 안다. 또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웃기기 위해 본인을 낮추는 일에도 서슴없다.
그녀는 낯선 이와의 정적을 잘 견디지 못한다. 또 여럿이 무리 지어 있는데 혼자 있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건 그녀가 외로워서가 아니라 다른 이가 그녀가 혼자 있는 걸 볼까 봐 그렇다. 그러니까 빌런은 본인 스스로의 기분보다는,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일에 집착한다. 그 또한 온전히 타인을 위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무례한 말을 잘 참는다. 듣자마자 바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최면을 거는데, 그럼에도 기분이 나빠져 오는 것이 느껴지면, 그 시간을 속으로 빨리 감기 하고, 스스로를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타협한다.
그녀는 본인의 감정이나 기분을 제일 우선순위로 무시해버린다. 잠시 본인의 기분을 인지했더라도 모른 척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들과 섞이고, 타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의 기분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학에 와서야 나는 내가 내 감정이나 기분을 바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에게 기분이 나빠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하고 잠들기 전에야 생각났다. 그때는 말하기에는 이미 늦은 때라 느껴졌고 그런 일은 계속 반복됐다. 빌런 그녀가 내 기분을 마취하는 데 익숙해진 탓이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원만한 관계를 맺기 위해 가장 최악의 방법을 고수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게도 나쁘고 타인에게도 나쁜 방향. 타인이 내게서 빌런을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솔직한 나와 관계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용기 내지도 못했으면서 그들은 빌런만을 좋아한다고 오만하게 판단해버렸던 나의 무지를 다시 되새김질하며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마음을 다진다.
나는 빌런, 그녀에게 얘기한다. 네가 호의를 얻으려고, 잘 보이려고 과하게 행동할 필요 없어.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과시할 필요 없어. 이제 생존을 위해 관계하던 너의 시기는 지나갔고, 너의 가장 큰 숙제는 너에게도 타인에게도 한 발짝 더 솔직해지는 거야. 그것뿐이야.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다는 목적을 갖고 하는 관계는 그만하자고 빌런에게 말한다. 어쩌면 아직도 사람들 안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나 섞이고 싶을 때는 빌런 그녀가 나를 제치고 나오는 순간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빌런 또한 나 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나는 빌런 그녀가 솔직해지는 것을 돕기 위해 오늘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들어가 용기를 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