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쉼이 필요한 이유
생각해보면 늘 조바심이 문제였다. 몸이 안 바쁘면 마음이라도 바빠야 안심했던 20대의 날들이었다. 나는 바쁘다는 감각이 좋았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쟤는 늘 바쁜 애”라고 인식하는 것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바쁘지 않은 누구누구 보다 우위에 있는 듯한 기분을 꼭 쥐고 내주고 싶지 않았다. 내 바램과는 달리 바쁜 애에서 쉬는 애, 뭐 하는지 잘 모르겠는 애가 될까 봐 다른 사람들의 성취와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달렸다. 그러면서 나는 어쩌면 내 삶에 있어서는 점점 문외 하게 된 것 같다. 생활의 아주 사소한 일 조차 누군가에게 물어 물어 겨우 해결할 때처럼 스스로의 나이가 한심해지는 그런 순간들이 생겨났다. 그러면서도 바쁘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래 왔던 성과를 내지 못한 낙오자는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쉴 때는 꼭 죄책감이 뒤따랐다.
꽤 바쁜 올해 상반기를 보냈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진 것처럼 더, 더 바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온갖 상념에 혼절할 것 같은 밤이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다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러다 엄마가 외갓집에 간다길래 냉큼 따라나섰다.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도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피며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뭔가 처리할 일들이 많이 남았는데 강제로 쉬러 나온 사람처럼 찝찝함에 어지럽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봤는데 더없이 아름다운 초록잎들이 내 눈을 덮었다.
그제야 나는 ‘아, 봄이 이런 색이었지’ 하고 새삼 놀랐다.
춥고 시린 겨울을 겨우 지나야 만 새로운 잎들을 돋아낼 수 있는 나무들인데 무심하게 바라봐주지도 않았구나-무언가에 몰두하고 바쁘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른 어떤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일 아닐까-
외갓집 근처에는 유난히 크고 푸른 나무들이 무성했다. 빛을 받은 나무들은 유난히 아름다웠고, 그 창창한 녹 빛에 불가해한 위안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러자 문득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에 나오는 양희의 대사가 떠올랐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양희의 말처럼 나무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누군가의 판단에 마음 졸이는 하루하루들, 말에 지치고 표정에 치이는 나무 같지 않은 사람들 앞에 서 있던 내가 나무 앞에 서니- 바람에 기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움직이는 그 모습이 담담하게 내 안의 뭉친 피곤들을 쓸어주고, 쓸린 마음을 만져주기 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걱정들이나 답답함 들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뭐라 표현해도 다다를 수 없게 눈부신 색을 발하는 나무들 앞에서는 그저 그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설령 내 앞의 일들이 나를 또 괴롭게 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와 이 나무들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다면 또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외갓집 거실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밖으로 나와, 풀을 보고 나무를 보며 걸었다. 그 시퍼렇고 시원한 공기를 서울에 가서도 마음이 바쁘기를 언제든 포기할 수 있도록 되도록 깊고 깊게 마셔 담아 가고 싶었다.
우리는 쉬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고, 가장 가까이 있는 쉼은 지금의 계절을 느끼는 것. 냄새를 맡고 나무의 색을 보는 것. 그리고 겨울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피어나는 나무들처럼 다시 환해질 수 있게, 불가해한 위로를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