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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나무 Sep 10. 2021

울적한 날엔 슈퍼에 간다


운이 나쁘게 집에서 제일 먼 중학교에 당첨됐던 것이 안 좋은 징조였던 것인지 중학교 생활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또 더 운이 나쁘게 그 중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나는 매일 책가방에 온갖 교과서와 노트를 모두 넣어 다녔다. 그 모든 교과목을 공부하겠다는 욕심에 비해 많이 게을렀던 나는 그 교과서와 노트를 거의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학교로 옮겼다가 집으로 옮겼다가 했다. 그 욕심의 결과로 지금의 거북목을 얻었다.


그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 재미도 없는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건 울적한 일이었다. 그래서 하굣길에는 늘 슈퍼에 들렀다.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진흥 슈퍼.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쳐 맨 채로, 드디어 하루 중 가장 흥미로운 순간을 맞이했다는 듯이 슈퍼 바깥쪽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뚫어져라 본다. 월드콘, 쿠앤크, 더위사냥 중에 고르다가 아이스크림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슈퍼 안쪽으로 들어간다. 진흥 슈퍼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유난히 말이 없고, 무뚝뚝하셔서 오래 고르다 보면 등이 오싹하고 손에 땀이 나서 재 빨리 골라야 한다. 나는 이내 라면 코너로 가서 비빔면을 집어 들고 과자코너로 가서 감자칩을 먹을까 초콜릿이 박힌 과자를 먹을까 고민한다. 할머니의 껌 씹는 소리가 슈퍼 가득 매운 정적을 유일하게 깨뜨린다. 씹다가 탁, 탁 하고 공기를 터트리는 소리가 어쩐지 내 마음을 초조하게 한다.


그렇게 울적하다는 이유로 나는 하굣길에 꼭 라면 한 봉지를 사거나, 과자 혹은 좋아했던 쿠앤크를 사 갔고 그로 인해 5kg이 넘게 쪘지만 내게는 지루한 교실을 오래 버틴 상이 꼭 필요했다.

그렇다. 울적한 날에는 우리에게 보상이 필요하다. 단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고, 매운 음식은 우울한 일을 순간적으로나마 날려준다. 그 군것질은 늘, 진흥 슈퍼가 해결해주었다.

 

진흥 슈퍼의 맞은편, 2분 거리에 명동 슈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는데, 진흥 슈퍼 내부가 약간 어둡고, 늘 젖은 박스 냄새가 나고 어떤 담화도, 잘 가라는 인사도 없는데 비해 명동 슈퍼는 내부가 아주 밝았고 내가 들어서면 아주 반색을 하셨다. 명동 슈퍼는 아줌마 아저씨가 우리 아파트 주민이어서 입주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는 곳이었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기도 했고.

우리 엄마도 일을 가지 않는 낮에는 거의 늘 명동 슈퍼에 있었다. 하굣길에 친구와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슈퍼 아줌마와 우리 엄마 또 다른 아줌마가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엄마는 늘 웃는 낯이거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골똘히 들어주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누군가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저런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슈퍼나 세탁소, 미용실은 손님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줌마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믹스커피를 타 마시고, 점심을 그 슈퍼에 앉아 같이 나누어 먹으며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어 끙끙 앓기만 한 하소연을 하고, 나만 알기 아쉬운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한낮의 무기력을 날려주는 장소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명동 슈퍼는 사라졌다. 나는 어린 마음에 아주 의아해했다. 아니, 그래도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명동 슈퍼에 가는데, 우리는 명동 슈퍼를 좋아하는데 왜 접으시지- 큰 마트가 많이 생겨서라고 했다.

진흥 슈퍼는 그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 우리 동네를 지켰다. 나는 그게 내심 고마웠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걱정이 됐다. 마트와 인터넷 쇼핑은 나날이 화려하고 저렴한 항목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편의점은 시원하고 쾌적한데, 진흥 슈퍼의 오뚜기 카레 박스 위에는 늘 먼지가 앉아있고, 할인이란 절대 없었으니까.


사라지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느낀 것이 무색하게 진흥 슈퍼는 꽤 오랜 시간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고, 내가 슈퍼에 잘 드나들지 않게 된 20대 중반 무렵이었던가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에서 다른 주인으로 바뀌었다. 나는 왠지 그분들이 없으니 진흥 슈퍼가 진흥 슈퍼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 재개발이 결정되기 한참 전에 진흥 슈퍼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건물 전체가 사라졌다.

 

나는 걷다가 오래된 슈퍼를 보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사라지지 않는 것만으로 고마운 마음이 드는 장소들이 있다. 어쩌면 그 장소들을 볼 때마다 내 유년이 아주 유실된 것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지나가다가 집에서 약간 거리가 있어서  이용하진 않았지만,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슈퍼  군데가 문을 닫은 것을 보았다. 사실  슈퍼보다는  앞의 평상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 거기서 쉬어가던 사람들이 기억난다. 테이블을  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웃고 떠들던 아저씨들도 어쩐지 생각나고. 이제 그분들은 어디에 앉아   있을까, 어쩌면 그 분들이 수다 떨 수 있는 장소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까 생각하며 멀뚱히 서서 문 닫힌 슈퍼를 랫동안 바라봤다.


지금도 걷다가, 오래된 슈퍼가 보이면 괜히 마음이 들뜨면서 편안해진다. 멈춰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본다.

 

오래된 슈퍼를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곳도 사람으로 북적일 때가 있었겠지- 아이들이 진열된 과자 앞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며 우물쭈물 서 있고, 어른들은 퇴근길에 병맥주와 마른오징어를 사 가곤 했겠지. 일요일 아침이면 짜파게티나, 라면 몇 봉지 사 가는 안 씻은 어른들도 많았겠고.

분홍색 쫀드기와 포도맛 알갱이 짝꿍, 미쯔와 미니폴. 나의 어릴 적 간식을 책임졌던 슈퍼. 몇 백 원만 있으면 당장 달려가 무얼 살까 조그만 손가락으로 동전을 굴리며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던 곳. 라면을 사 와서 잘게 부수고 수프를 몽땅 넣어 마구 흔들면 여러 아이들과 맵다고 헥헥거리면서도 오래 먹을 수 있었고. 좀 더 크고는 집에 국이나 반찬이 변변치 않을 때 씻지도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눈곱만 떼어 츄리닝에 캡 모자만 얹고 달려 나가 햇반과 고추참치, 3분 카레를 사 올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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