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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27. 2022

거리 위의 반짝이는 순간들

평생을 산 동네를 떠나기 한 달 전

한 곳에서 32년을 살다 보니, 나는 이 동네가 나 인 것만 같다. 머물 때는 몰랐다가 떠날 때가 되니 곳곳이 새삼 아름다워 보인다.


걷는 것이 좋아진 건, 걷다가 만나는 뜻밖의 풍경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면서부터 였을 것이다. 별 일이 없는 날에는 저녁에 2시간 정도를 걷는다. 우리 집 주변에는 번듯한 산책로가 없어서 내가 만든 루트가 있다. 일단 내가 나온 초등학교 쪽으로 쭉 올라간다. 그 길가에는 오래된 주택가와 쓰러져 가는 가게들이 있다. 거의가 문을 닫은 듯한데, 계속 장사를 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가게들이 있다. 미장원, 수선집, 신발가게. 나는 어둑한 길에 드문 드문 가게들의 불이 환한 것이 반갑다. 그 가게의 주인아줌마, 아저씨들은 늘 장사에는 관심 없다는 듯 가게 입구를 등지고 티비를 보고 있다. 어릴 적 이 거리를 지날 때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때는 꽤 번듯한 시장 골목이었고, 주말이면 북적대던 곳이었다.


그 거리를 지나면 군부대를 낀 큰 도로가를 지나 내가 나온 중학교를 낀 중간 너비의 길이 나오는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늘 서늘한 곳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물고 조용한 길. 그쯤에서 한번 멈춰 서서 공기를 깊이 마신다. 쓱 내가 졸업한 중학교 건물을 한 번 바라본다.


그 거리를 지나면 큰 도로가가 나온다. 나는 환하고 큰 건물이 많은 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걸음이 빨라진다. 한 10분쯤 큰길을 걷다가 좌회전하면 가로등과 큰 나무가 쭉 뻗어 있는 좁지도 넓지도 않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걸을 때쯤이면 발목이 시큰하다. 나는 그 가로등 길을 좋아한다. 그곳만의 분위기가 잘 서려있는 길이 좋다. 그 길의 끝에 미군 부대가 사라지고 들어선 큰 공원이 있다. 비가 오면 두꺼비가 엄청나게 울어대고, 밤 10시가 넘으면 혼자 들어서기엔 무서운 꽤 커다랗고 자연친화적인 공원인데, 꼭 평평한 산길을 걷는 느낌이다. 그 공원 둘레를 크게 돌아 나오면 이제 내가 걷는 루트의 후반부이니 귀갓길인 셈이다. 공원에서 나와 신호등을 건너면 목이 마르든, 그리 마르지 않든 편의점에 들어가 꼭 포카리스웨트를 사 마신다. 음료를 들고 속도를 줄여 터벅터벅 한 30분 정도를 더 걸으면 그 루트가 끝이 난다.


2시간가량 되는 루트, 그 거리 위에서 오디션 연습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하고, 우울해하고, 기뻐했다. 어떤 날은 환희에 벅차 달리듯 걸었고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어 내달렸다. 하루의 끝에는 늘 이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길 위에서 삶의 잔여물들을 훌훌 털어버렸다.  


루트의 끝은 아파트에 있는 고양이 집이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고양이들을 위해 2층에 사는 언니들이 놀이터 앞에 만든 스티로폼 고양이집이다. 운이 좋으면 그 고양이들을 만나고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삶이란 참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 생겼을 때 보다도, 2시간가량 걷다가 고양이 집에 다다랐을 때 내가 보고 싶은 고양이가 있을 때 더 크게 웃게 된다. 평소에도 집에서 글을 쓰다가, 연습을 하다가 답답해지거나 지겨워지면 한 번씩 그 고양이 집 앞을 어슬렁 거리다가 오면 환기가 되었다.


스티로폼으로 고양이 집을 만들고, 늦은 밤에 꼭 사료를 채워놓는 다정한 이웃을 만난 것이 참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언니들과 마주치면 늘 웃으며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내 소개를 한 적도 없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언니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언제부터 여기 살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양이 얘기를 나눌 때면 누구보다도 친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 동네를 떠나기 한 달가량이 남은 요즘. 내가 좋아하는 이 동네의 구석구석을 내 안에 어떻게든 구겨 넣기라도 할 듯이 나는 매일을, 매일매일을 놓치지 않고 걷고 있다.

나는 늘 반짝이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이제는 어떤 순간이 반짝이는 순간인지를 바로 아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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