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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집 Sep 28. 2022

9월의 새벽 6시를 아시나요

마을 이야기 2

 추석에는 마을 대청소를 합니다.


 9월의 새벽 6시는 어떤 색과 공기인지 아는 사람도 물론 많겠지만 저는 사실 잘 몰랐습니다. 그 시간에는 일어날 일이 많지 않을뿐더러 눈을 뜬다고 해도 정신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시간이 얼마나 알록달록하고 시원하고 보드라운지 그리고 나 빼고는 모든 게 깨어나 있는 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가을,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가 어디서 뭘 했는지 온통 지푸라기를 묻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올라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어르신들은 아침잠이 없어서 새벽부터 밭일을 하신다고 하던데 엄마는 벌써? 그럴 리가 없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요.

“추석맞이 마을 대청소를 실시합니다. 한 집에 한 명씩 마을 주민들은 빠지지 말고 나오세요!”

엄마는 듣고 저는 못 들었던 통장 아저씨의 방송. 새벽 6시까지 나오라고 했으니 엄마는 제가 나갈 리가 만무하다 생각하고 혼자 그렇게 마을 청소를 하고 오셨어요.

세상에나,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가 그렇게 귀여웠는지! 그다음 해엔 내가 나갈 거라고 엄마에게 호언장담을 했더랬지요.


 새벽 5시 50분. 알람 소리에 겨우 눈을 뜨니 바깥은 아직 컴컴합니다. 이 와중에 세수가 뭐 필요하냐 싶어 눈만 겨우 비비고 대문을 나서니 옆집 할머니는 벌써 나오셔서 집 앞을 쓸고 계셨어요.

“할머니, 저는 뭐 들고나가면 돼요?”

“뭐, 빗자루나 하나 들고 따라오면 되지. 오늘은 아가씨가 나오나?”

“네, 엄마한테 올해는 제가 나간다고 했어요.”

“아이고, 그래, 그래.”


 조금 젊은 어른들이 예초기를 하나씩 짊어지고 억세게 자란 잡초들을 한방에 눕히면, 그 뒤를 따라 흐트러진 풀 찌꺼기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하는 건 우리(여기서 우리는 할머니들과 나)의 몫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어르신들도 많이 만났는데, “누군고” 하시면 옆에서 우리 할머니들(여기서 우리 할머니란 우리 집 상하좌우 할머니들)이 “우리 마을 애기다, 애기” 해주셔서 한바탕 웃고 저는 살짝 부끄러워지고 말았네요.

이 집 저 집 이야기며, 옛날에 이 자리엔 무엇이 있었고 할머니들은 몇 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드시는지 듣고 있으니 옛날에는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 다 알았다는 사실이 충분히 믿을 만 하구나 싶었습니다.


 올해 추석 전날에도 어김없이 통장 아저씨의 우렁찬 방송이 들렸습니다.

“내일 6시 추석맞이 마을 청소를 합니다. 내일은 빵과 음료도 준비되어 있으니 한 집도 빠지지 말고 나오세요들”

태풍 오고 있다는 소식에 혹시나 취소될까 살짝 기대 아닌 기대를 했지만 청소하기엔 최적인 흐린 날씨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할머니들 따라다니며 뽑고 쓸고 줍고 하다 보니 컴컴했던 하늘은 금세 밝아지고, 깨끗해진 동네가 한눈에 보입니다. 빨간 옷 노란 옷 꽃무늬 옷 입고 삼삼오오 모인 할머니들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야기하십니다) 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사랑스러웠는지요.

 마지막 모임 장소에는 오토바이 뒤칸에 실려온 빵과 음료수들이 차례차례 나누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 좋아하시는 단팥빵, 카스텔라, 꿀호떡 그리고 베지밀과 식혜까지.

뭐가 귀여울 일이야 하겠지만 그 장면을 직접 본다면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텐데요.


가만히 앉아서 바람만 쐬어도 좋은 계절이 가을입니다.

그 좋은 날 단 하루 내 얼굴은 제대로 못 씻지만 동네 얼굴 깨끗이 씻어주는 아침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우리 마을에 없었다면 저는 어디에서 이런 마음을 배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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