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이야기 3
2월 마지막 주 땅이 깨어납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지 않았나요?
제가 사는 곳은 눈 구경 하기 어려웠지만 다른 지역에는 폭설 뉴스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삼한사온이라는 옛말은 온데간데없이 일주일 내내 추웠던 날도 있었어요. 원래 너무 추운 겨울도 너무 더운 여름도 견디기 힘들어 징징거리던 제가 이젠 차라리 여름이 더 낫다고 외칠 만큼 추웠던 것 같아요.
그 추위도 이제 끝이 나나 봅니다. 신기하게도 2월이 되고 입춘이 지나고 나니 공기도 바람도 달라지는 게 아니겠어요. 여전히 차가운 공기지만 왜인지 아지랑이가 몽글거리는 것 같고, 여전히 쌀쌀한 바람이지만 왜인지 코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랄까요. 외투의 단추도 잠그지 않게 되고 웅크렸던 어깨도 조금 펴게 됩니다.
무엇보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에 보는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님들 덕분이지요.
단단하게 얼었던 땅에 조금씩 숨구멍이 보일 때쯤이면 (사실 저한테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트랙터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그 자리는 땅 속 깊이 물기를 머금고 있던 흙이 뒤집혀 올라옵니다. 조용하게 잠들어 있던 논밭이었는데요,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 울퉁불퉁 솟아나고 온통 빛바랜 흙색만 가득했던 땅에 푸르고 짙은 색이 입혀집니다. 푸짐하게 뿌려져 있는 거름 덕분에 지나는 길마다 으악하지만, 6년 차 시골 생활 덕분에 후각도 튼튼해졌으니 이 정도야 조금 빠르게 걷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며칠 후면 옆집 할머니랑 같이 신청해 두었던 거름 포대가 각자 집으로도 배달이 될 예정입니다.
이사를 오고 첫 봄을 맞이할 이맘때쯤 통장님이 동네 방송을 하시더라구요.
"아! 아! 농가에 알립니다! 오늘부터 거름 신청을 시작합니다. 경로회관에 오셔서 신청하십시오오오!"
일단 텃밭을 만들어뒀으니 농사 비스무리한 걸 지어보려고 하는데 거름을 어디서 사나 하던 참이었지요. 그때 마침 옆집 할머니가 "내가 신청하면 싸게 살 수 있으니까 같이 신청할랑교? 몇 포대 필요한교?" 하시며 빼꼼히 담 넘어 알려주시더라구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모종가게 어딜 가든 거름은 쉽게 살 수 있었겠지만, 동네에서 농가로 등록된 집집마다 나눠주는 거름은 훨씬 저렴한 값에 배달까지 해주시는 데다가 농사 고수인 할머니들과 같은 거름을 쓰면 왠지 더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넙죽넙죽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그 후로 몇 해 동안 옆집 할머니는 잊지 않고 저희 집을 챙겨주신답니다. 같은 거름을 쓴다고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배우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든든합니다. 이 거름을 뿌리고 나면 마당에도 꼬릿꼬릿 구수한 봄의 향기가 가득하겠지요.
대문 바로 앞에는 마음이 유독 급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매년 입춘이 오기 전, 매서운 겨울이 조금 사그라들었나 싶을 때면 어김없이 혼자서 꽃망울을 팡팡 터트리고 있답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한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세우게 하고, 살짝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짙은 매화향이 코 끝에 와닿습니다.
"아이고, 요 며칠 따뜻하다고 봄인 줄 아는가 보네."
그렇습니다. 아직도 겨울은 한창 진행 중인데 봄기운이 얼마나 반가웠으면 이렇게 급하게 꽃을 피웠나 싶을 정도입니다. 매정하게도 겨울바람은 매화나무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금세 휘몰아치지만, 꿋꿋하게 꽃을 피우고 향을 날리고 꿀벌들에게 친구가 되어줍니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나무들을 유심히 보세요. 어느새 한껏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다 잘라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지치기를 했는데도 야무진 새 가지를 다시 뻗치고 올망졸망한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겨울 나뭇가지였는데 이토록 장한 일을 하고 있었네요.
지난 늦가을에 심어 두었던 양파도 무사히 겨울을 지났네요.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사르르 불고 다른 작물들은 이미 거두어 저장해 놓기 바쁠 때 (사실 저장할 만큼 많이 성공하지도 못했지만요) 양파 모종을 사다가 심었습니다. 신기하지요. 땅 속이 아무리 더 따뜻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게 다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한겨울을 이겨낼 수 있다니요. 냉해를 막기 위해서 농사 비닐(검은 비닐)을 덮고 모종을 심을 수도 있지만, 비닐 쓰레기가 싫은 것도 있고 보기에도 마음에 안 들고(?) 무엇보다 귀찮은 것도 커서 맨땅에서 잘 자라줘 하는 마음으로 심었기 때문에 사실 장담은 못하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외할머니 댁에서 얻어 왔던 왕겨 이불이 (바람에 많이 날아가긴 했지만) 월동하는 데에 조금은 보탬이 된 것 같습니다. 약해 보이긴 해도 새파란 싹이 자라고 있고, 자세히 보면 새로운 줄기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뿌리가 잘 살아있으니 완전한 봄이 오면 몸집을 튼튼하게 키울 겁니다. 온갖 요리에 들어갈 수 있는 달달한 햇양파를 먹을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이제 눈길도 발걸음도 좀 더 빨라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계절은 엄청 부지런해서 우리의 게으름을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하룻밤 사이에 잔디 새싹이 올라오고, 마당 귀퉁이에서 수레국화 싹이 뽕긋 얼굴을 내밀고,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며칠 사이에도 모든 것에 물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번 겨울도 끝이 나네요. 저는 이제 호미랑 장갑이랑 고무신이랑 이것저것 챙기러 가야겠습니다. (또 뭐가 있더라... 주섬주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