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아이와 부딪히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나도 겪은 사춘기이지만, 나와 너무도 다른 성향의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춘기라고 이해하며 매번 져 줄 수도 없고, 아이를 이겨보려고 매번 싸울 수도 없었다.
아이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특별 처방이 필요했다. 여러 방도를 궁리하던 중 아이를 이해해 보기 위해 청소년 교육학을 공부해 보면 좋을 듯했다.
청소년 교육학 공부할 곳을 찾다 보니 교육학을 배우고자 휴학했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통대)가 생각났다. 교육학과 더불어 청소년 교육학 과목도 수강이 가능한 것을 확인하고 방통대 재입학을 결심했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아이 교육과 관련된 책에서 말하 듯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책을 자주 읽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교육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직장 생활을 하며 공부할 수 있는 방통대 교육학과에 편입을 했다. 일반 대학처럼 매일 출석을 안 해도 되었고, 리포트와 시험으로만 평가한다는 학교 설명에 직장을 다니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간의 출석수업이 있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시험으로 대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기존 전공과는 연관성이 전혀 없어,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리포트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았지만 제대로 내용을 찾은 건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막막했다. 교육학이라는 타이틀에 매력을 느꼈을 뿐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막막한 시험 범위 양과 이해할 수 없는 교과서 내용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한 학기 성적표를 마주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을 건데?'
'직장 생활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
방통대를 계속 다닐 필요가 없는 이유를 수 십 가지 만들었다. 이직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직장에 적응도 해야 했고, 퇴근 후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이라는 나의 계획은 무리였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을 기다렸다는 듯이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
2년 동안 등록을 안 하며 자동적으로 제적 처리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오던 등록 권유 메일도 끊겼다.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며 방통대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재입학 등록을 하고 교과서와 워크북을 구매했다. 교육학과 카페를 알아본 후 가입해 선배님들의 정보를 참고 삼아 족보를 출력했다.
오랜만에 문구점에 가 필통을 사고 색색깔 형광펜과 볼펜 등을 사 필통을 화려하게 채웠다. 책상에 놓인 교과서와 필통을 보니 진짜 학생이 된 듯했다. 예전처럼 벼락치기는 안 될 것 같아 출석 대체시험과 기말 시험을 대비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엉덩이를 무겁게'를 실천하려 무던히 애썼다.
하지만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본 아이의 반응은 책에서 본 이론과는 달랐다.
“어른이 돼서도 공부해야 돼요?”
아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좌절했다. 혹시나 하고 기다려 보았지만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반응은 끝끝내 보지 못했다.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려는 나의 욕심이었을까. 매일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시험 전 단기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인 것 만으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었나 보다. 1년, 2년이 지나도록 아이는 내 옆에서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무사히 방통대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실습을 하여 ‘평생교육사’ 자격증까지 보너스로 취득할 수 있었다.
아이의 사춘기로 매일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지만,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아이가 내 옆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교육학과 청소년 교육학을 공부하며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마무리를 하지 못해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방통대를 다시 시작하게 하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또 하나의 깨달음은 ‘내 아이는 다르구나’였다. 매번 기대하고 실망하지만, 다름을 인정하며 아이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중이다.